돌담 변주

by 이채이

돌담 사이를 걷는 일은 즐겁다. 돌담은 이 땅의 돌을 치우거나 쌓아서 울타리를 치고, 각각의 울타리 사이로 좁다란 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봄날 돌담길을 걷다가 돌 위에 손을 얹으면, 메마르고 찬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 시간만큼의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느리게 온기를 품은 돌들은 제 나름의 꿈을 꾸는 듯하다. 돌담은 길로 이어지지만, 끝나는 곳에는 새로운 길이 또 생겨나서 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 길 끝에서 나는 또 다른 돌담을 만난다. 바람이 아직도 차가운 2월, 남도 여천의 낮은 돌담들 속에 숨죽인 마을이 있다.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애양원이다. 어려서 피부병이 심했던 오빠는 늘 긁어 피딱지가 앉아 있었는데, 병원도 약도 귀하던 시절 그 가려움을 덜어주는 길은 멀리 애양원에 가서 약을 구해 오는 일이었다.


당시 내 귀에 애양원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새겨졌다. 그들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거대한 고리 가운데 병(病)에 오래 머물러 있는 이들이었다. 신은 쉽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기 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자존의 극한까지 산 자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의 신은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 예배당의 높은 곳에, 축복처럼 서 있었다. 신은 그들을 버린 듯했지만, 생명은 무겁게 남아 제 기도를 다 하고 있다.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을 모으고, 흘러내린 귀로 안경을 걸 수 없어도, 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자들의 경건은 단단하고 복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애양원에 “사람의 살이 물러 썩는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린 나는 그들 곁에 가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스승 고정희 선생님과 남편 기세충 선생님을 따라 봉사활동을 다니며, 그 두려움을 넘어섰다. 환우들의 집에 들어가 악수하고 대면했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신이 귀중한 뭔가를 만들기 위해 잠시 밀쳐 둔 소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 너무 오래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느리고도 착잡한 삶이고 철저히 돌담 안에 갇힌 삶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예배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은 흩뿌려진 꽃잎처럼 점점이 소생하고 있었다.


숲에는 그들의 눈물을 기억하는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그곳에 가면 바닷바람을 걸러낸 신생의 공기가 있었다. 텁텁한 공기를 깨끗하게 걸러 주는 필터처럼 그들의 삶은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둘러쳐진 돌담에서, 온전히 보호받고 있다 느꼈다. 그들의 기도는 늘 같은 것이었다.


"불치의 병을 통해서라도 신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육신이 온전한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 돌담을 빠져나오면 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제주의 돌담 가에 서 있다. 제주가 돌과 여자와 바람이 많아 삼다도라 불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구멍이 숭숭한 현무암이 그 많은 바람을 모조리 받아낸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바람은 어디에나 있지만 제주의 바람은 특별히 돌담 사이 좁은 틈에 머문다. 바람은 구멍 많은 돌에게 자주 불려 가서는, 세상의 이야기로 그 빈 곳을 메꾼다. 놀다 지치면 각기 제집으로 간다. 바람은 바다로 가고 돌담은 마을로 간다.


제주에서는 집을 지을 때 돌로 울을 친다. 그 사이사이로 환한 꽃이 피어나고 당근잎이 푸르게 자란다. 사람이 죽으면 바다에 내다 버리지 않고 밭 가운데 또 네모난 돌 울을 쌓고 묻는다.

제주의 돌담은 삶을 경계 짓고, 죽음을 경계 짓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밭이랑마다 싱그러운 생명이 넘실댄다. 그것은 유채 나물이거나 시금치거나 푸릇한 무청이다.


까만 돌담의 어둠을 명랑하게 냉큼 바꾸는 것은 단연 노란 감귤이다. 가지에 매달린 감귤은 종일 빛이 부서지는 바다를 본다. 바다의 빛은 반사되고 응집되어 황금빛으로 동글동글하게 맺힌다. 감귤이 담장 밖으로 쏟아지면 나는 넋을 놓고 자연이 칠한 빛깔을 흠모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돌담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남도 끝 애양원의 울타리에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와 신의 축복이 가득했다. 그들은 견고하고 웅장하게 삶을 버티며 서 있었다.


제주의 돌담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를 좁혀놓고, 어디에나 흔한 그 돌과 바람으로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들려준다. 그것은 적막하고 어지러운 장송곡이 아니다. 유채의 향기를 실은 바람이 불러내는 가벼운 삶의 변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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