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추 6번과 7번 사이의 디스크가 파열되었다. 2주일 가까이 되었다. 왼쪽 어깨와 팔은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다. 머리를 감으려고 하면 오른손으로 왼손 팔꿈치를 받쳐 들고, 겨우 머리 부근까지 손바닥을 밀어 올려 줘야 한다. 손가락은 힘도 의지도 자유마저도 잃었다. 그저 외양의 형태만 유지한 채로 어깨에 달려있다.
방사능 차단 앞치마를 입은 간호사가 보조를 한다. 의사는 목과 손에 차단 가죽띠를 둘렀다. 잔 머리카락이 나오지 않도록 1회 용 헤어캡을 쓰고 누우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을 종이테이프로 고정시킨다. 이마가 바닥으로 가게 누우면 목에 소독약을 바른다. 소독약이 휘발되도록 둔다. 의사 선생님은 섬세하게 주삿바늘의 끝이 향할 지점과 깊이를 측량하고 목에 찔러 넣는다. 경추 사이에 세 발의 주사를 꽂고 약을 주입한다. 천천히 주입하면 덜 아프다. 의사 맘이 급하면 아프다. 약물이 서서히 경추 신경을 타고 근육에 번져 나가면 고통은 사라지고 이내 살 것 같다.
나이 50이 넘으면 보통 대여섯 가지의 만성질환이 생기기 시작한다는데, 하나의 원인이 다른 병의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또 원인이 되는 식이다. 머리가 꼬리를 먹고 꼬리가 머리를 무는 식으로 중년의 병은 서로 친밀하다.
이삼십 대 때는 세상이 마뜩잖고 만사가 풀리지 않는 듯 여긴다. 그나마 성한 몸에 술을 붓고 담배를 피우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건강한 삶을 소진한다. 그러다 지천명에 이르면 깨닫게 된다. 내가 가졌던 건강이 영원히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건강이 자연발생적이라 여기고 그 지속성 또한 의심하지 않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몸과 분리되려는 팔을 간신히 붙들고 주사를 놓아 고통을 줄인다. 나이 쉰을 거저먹은 게 아니고 더불어 노화와 병듦까지 함께 가지게 되었다.
평상시의 자세는 척추와 경추에 그대로 퇴적되었고, 결국 내 몸은 주체적 내가 아닌 객체로서의 나로 바라보게 한다. 나는 진료실에 있지만 나의 뼈와 골격은 모니터 화면에 있다. 아픈 사람은 나인데 의사는 나를 보고 얘기하지 않고, 사진 속 뼈와 뼈 사이의 허연색 물질이 드러내는 모양에 대해 말한다. 고통은 진료실 의자에 앉은 내가 받아내고 있지만, 의사는 사진에 찍힌 육골의 애석함을 아직도 말하고 있다.
뼈의 완충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터져버린 디스크는 민달팽이처럼 뻗어 내려오며 신경을 건드린다. 살아있는 신경은 온갖 비명을 지르라는 뇌의 지령을 받는 모양이다. 함성처럼 쏟아지는 아우성에서 말의 또렷한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듯이 고통은 그렇게 전방위적으로 기습한다.
나는 고통의 시간과 강도를 견디지 못한다. 나의 고통은 수치로 말끔하게 표현할 수 없고 정확한 위치를 찍어내서 국부적 치료를 할 수도 없다. 경추에 처치한 주사로 당장의 아픔은 가셨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계 인간의 팔이 붙어있는 것 같다. 물론 미관상의 편의를 위해서.
아침에 일어날 때면, 밤새 날뛰던 염증이 혈관에 갇혀있는 듯 팔이 뻐근하고 손이 부어있다. 팔꿈치 관절부터 손목 관절로 이어지는 긴 뼈 사이에 구멍을 뚫어 온밤을 괴롭히던 종창(腫脹)의 부기를 뽑아내 버리고 싶다. 이제는 예전처럼 오래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자유로이 팔목을 움직이며 타이핑할 수 없다. 아직도 왼팔은 나의 팔이 아니다.
그럴 때면 충전 보드에 누워 에너지를 저장하는 휴대폰처럼, 나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고 상상을 한다. 침대에서 뿜어지는 광대역의 에너지파가 내 온몸을 채우고 관절에 윤기를 더하기를. 그리고 까칠함을 보여준 파열된 목의 디스크에게, 뜨거운 불에라도 데인 듯 아팠을 신경 줄기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그러면 왠지 조금은 위로가 된다. 십여 분을 누워 있으면 나는 또 글을 쓸 수 있다.
일주일이 지났다. 소독약 냄새가 낮게 배어있는 처치실에서 또 한 번의 주사를 기다리며 나는 남은 고통을 헤아리고 있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을 설명했지만, 구체적 속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찢어진 디스크가 회복되어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으리라는 의학적 소견을 고대하고 있다. 메마른 강줄기를 적시는 물처럼, 경직된 팔에도 붉은 피가 다시 흐르기를 소망하고 있다.
병원에 가면 삶과 죽음이 교묘하게 교차하고, 숙명을 마주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내 고통이 불을 뿜는 동안, 누군가의 상처는 비명과 핏자국으로 더 선명해진다. 아픔의 강도는 산 자 모두에게 개별적인 것이라 비교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몸으로 괴로움을 견뎌낸다. 운명 앞의 그들처럼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