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나비 “왜냐고 묻지 않는 삶”에 대하여

-나는 지금 이유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by 이채이


왜냐고 묻지 않는 삶. 그것은 ‘나중에 대한 강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
무엇보다 현실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내는 일.


나는 지금 '이유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오늘 내 ‘독서나비’의 화두다.

왜 사람은 자신을 해명하며 살아가는가?’ 왜 우리는 스스로 나를 해명하고 싶어 하는가?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완벽하게 안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더 이상 나를 해명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갈증과 목마름 때문 아닐까. 나를 좀 더 입체적으로 보기를 원하고 또한 타인도 나를 좀 더 입체적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타인 또한 그렇게 나를 보아주기를 원한다.

캔버스에 갇힌 평면적인 ‘그림 같은 나’가 아니라, 사방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조각 같은 나’.

입체적인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싶고, 인식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해명’이란 결국, 나조차 모르는 나에게 다가가려는 필연적인 시도가 아닐까.


“너는 <왜?>라는 질문을 멈춰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을 멈췄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통찰의 순간이 아니었다. 그저 삶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싶을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죽음을 앞에 두니 나는 한결 너그러워졌다. 내가 가지려고 애쓴 것, 되고 싶어 안달 났던 것, 가졌던 것의 덧없음 앞에서 평온해졌다. ‘이제 이 손만 놓으면 모든 것은 처음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라는 생각이 기뻤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서야 비로소 너그러워졌다. 애써 가지려 했던 것들, 안달하며 되고 싶었던 것들, 이미 손에 쥐었던 것들까지도 덧없게 느껴졌다.

“이제 이 손만 놓으면, 모든 것은 처음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구나.”

그 생각에 묘한 기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기쁨의 한가운데, 날카로운 화살 같은 통찰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나는 한 번도 질문이 멈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구나.’ 늘 특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늘 ‘누구처럼’이라는 비교 속에서 자신을 규정해 왔다. 나는 온전히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가난한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유년의 어느 시점 소중한 존재를 죽음으로 잃었고, 그 상실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다. “왜 나만?”이라는 물음은 어느새 나를 잠식했다.


그 물음은 나를 ‘에고’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슬픔과 아픔의 근원을 무의식 깊숙이 숨기고 자물쇠를 채운 건,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연습이 곧 삶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에고 입장에서는 만사가 고통이지.”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을 받아들인다는 건, 더 이상 멘털에서 해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이 나를 안심시킨다.

“단순하게 살아라. 그래야 남들도 단순하게 산다.”

간디의 이 말처럼, 오늘도 나는 질문 없는 단순함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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