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바람개비

by 이채이

취한 술에 영혼마저 젖어있는 그녀의 곁으로 간다. 그녀에게 올가을은 냉담하다. 밤을 꼬박 새운 목소리는 취기에 절어있었고 겨우 뜬 눈으로 전화를 붙들어 말을 이어간다. 소주의 쓴맛이 시공을 날아 메케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듯하다.


그녀의 정원에는 아직 푸른 느티나무가 서 있다. 계절을 아랑곳 않는 당당함이 거기 있다. 그녀 아픔의 근원은 그 느티나무의 푸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려버리는 느티나무 같은 남자를 그녀는 안고 있다. 나무의 몸통을 껴안고 볼을 비비며 땅을 향해 발을 구르고 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둥지를 지키기 위해 운명의 회귀를 탓하고 있다.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처럼, 부러진 날개의 피를 닦으며 고난을 맞이하고 있다. 그녀는 마태복음을 읽고, 요한계시록을 읽는다.

"저는 요한계시록이 묵시로 엮인 배신의 이야기 같아요."라며 복수를 되뇌이던 그녀. 마태가 말하고 싶었던 복된 말씀은 불륜과 배신에 관한 이야기라며 씁쓸히 웃던 그녀를 기억한다. 복되고 축복된 말씀 가운데 스며드는 그녀의 불온한 생각의 뿌리는 느티나무 같은 남자 때문임을 안다.


남자는 가지를 일렁이는 바람에 내맡기며 싱그럽게 웃는다. 다른 여인을 향한 그 웃음은 젊어서 아름답고, 가차 없이 당당하여 우울해진다. 기어오를 수도 없이 커져 버린 느티의 가지마다, 수만 개의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있다. 그의 마음엔 여러 사랑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결말을 알고 있는 드라마 감독 같다. 필름을 돌려보고 잘라내고 다시 이어 붙이며 논리를 만들어낸다. 한 번의 가위질도 서툰 그녀에게 그는 상상 너머의 사람이다.


그녀가 사는 도시에 갯바람이 불어온다. 갯가의 풀들이 바다를 향해 내지르는 소리가 묻어 들려온다. 갯바람은 쉰내가 난다. 역겨운 비린내를 품고 있다. 오래전 썩어 없어진 죽은 것들의 환영이 일제히 일어나 산 것들을 덮쳐온다. 삶 위로 불륜의 바람은 매정하게 겹쳐온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그녀의 마음 안에 숨겨둔 과거와 겹친다.


"네 슬픔의 근원은 무엇이냐?" 내가 그녀에게 묻는다.

말이 없는 그녀에게 나는 배우처럼 방백 한다.

"미치도록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것과 증오와 배신감 안에서도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겠지...."

그녀의 혀 마디가 풀어져서 혼잣말 같은 발음이 새어 나온다.

"마~즈아요~"


오늘도 그녀는 취할 것이다. 이 아름다운 배신의 계절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잊는 것뿐이다. 술은 그녀를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지 못하게 붙잡는다. 오로지 순간만을 기억하게 한다. 쓴 소주가 달게 느껴져서 한 번 웃고, 어깨를 빌려주는 내가 좋아서 한 번 더 웃고. 그녀는 그저 그와 더불어 피어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 사실이 꿈결처럼 믿기지 않아서, 한 잔 더 마신다. 과거는 반복적으로 술잔에 담겨온다.


그녀의 걱정은 다정이다. 나무의 밑동을 껴안고 고개를 쳐들고 웃고 있다. 갯벌의 배꼽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은 하강 기류를 타고 음습한 갯 골짜기로 흘러간다. 우거진 갈대 수풀을 헤치면, 그 속에서 정분이 난 개개비를 만난다. 바람과 생명이 맞닿는 경계에서 질펀하게 놀아나는 사랑놀음에 지친다.


그녀는 울면서 웃고 있다. 그 웃음은 마지막 잎새처럼 처연하고 애달프다. 수십억 광년을 날아와 눈에 박힌 밤하늘의 별을 세듯, 그녀는 해독되지 않는 마음의 말을 세고 있다. 별과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고 신화를 엮듯이, 과거의 사건들을 이어서 완결된 문장을 만들려 하고 있다. 그 문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밥을 토하고, 원망의 말도 토해내라고 한다. 가래침을 뱉으라고 말한다. 무릎을 꿇은 그녀가 땅바닥에 앉아버린다. 느티나무에서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읽는다.

술잔이 연거푸 돌듯, 그녀의 마음도 순환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거세게 흐를 것이다. 한 병의 술이 바다를 취하게 할 수 없듯이, 한 병의 잉크가 바다를 물들일 수는 없다. 기억에 젖지 않는 오늘이 천천히 지나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금붕어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