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은 너무 허황되어 대거리할 힘조차 빠질 때가 있다. 자연에 박힌 시골의 삶으로 걸음을 옮기면 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생생함이 피곤에 절은 도시인을 살아나게 한다는 것을.
내가 삿된 생각에 젖어 헛된 말을 늘어놓으면, 농사를 짓는 내 친구는 조용히 제 말을 한다.
"그 말에 어디 밭이 갈리것나..?“
평생 책장을 넘기며 말의 논리나 찾고, 적확한 낱말의 꼬리를 잡고자 애쓴 나에게 던지는 그의 한 마디는 도심의 에밀레종처럼 긴 여운이 있다.
말이 그냥 흘러가버리기도 하고, 청동종처럼 먼데 사람에게까지 진동하고 떨리기도 한다. 헛됨 속에도 진심이 있다면 그 말을 용서하기로 한다. 허황됨도 존재의 한 방식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진리 같은 말은 진실의 말이 아니라, 진실 너머에 툭 던져진 말 같다. 그물을 손질하는 바닷가 여인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노래 같은 말을 듣는다. 말은 거친 파도를 닮아서 타고 내리는 억양이 되었구나.
"백날 그물을 던져봐라. 괴기가 잡히는가 보자.."
"물살을 보고 던지라 말이다 “
그들의 말에는 암호문이 없고, 삶에 끈적하게 묶이지 않은 언어는 그 자체로 낯설어 싱그럽다.
타박하는 대거리가 좋아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는 나를 보며 그들이 웃는다. 웃으며 곡주를 건네준다. 휘휘 저어놓은 막걸리는 마실수록 들큰하다. 막걸리가 한 잔 들어가면 여인네들의 노래는 무한 반복이다. 그 계보 없는 가락이 좋아서 박수를 쳐댄다.
나의 말이 누구에겐 다독거림이 되고, 아픔이 되어 고이기도 한다. 아픔처럼 고인 말의 끝자락에는 마음이 묻어 있는데, 그 애틋함이나 간절함의 코드를 해독하는 이는 나의 그리움이 된다.
봄이면 알뿌리에서 촉을 내민 붓꽃처럼 탐스럽게 기억되다가, 장미의 계절엔 흐드러져 피어버리는 실성한 마음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내가 늘어놓는 그리움의 순간들은 유순한 은유로 짜여있다. 겨울을 덮어버릴 눈더미 속에, 한 방울의 피는 오래 붉다. 얼었다 녹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언 가지에 매달린 검붉은 열매처럼, 겨울을 껴안고 묵묵히 버틴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미워한다는 말의 직조방식은 씨실과 날실의 교직처럼 짜이지 않는다. 그런 말은 직조 과정을 생략한 채 던져진다. 잘 짜인 무명 위에 툭하고 떨어진 동백꽃 같은 것이다. 씨실과 날실의 틈을 파고들어 스며들지 않고, 바다 위에 뜬 부표처럼 제 홀로 떠다니는 말 같다.
붉은 말에 설레기도 하고 그 붉음에 멍이 들기도 한다. 파도를 거스르지 않는 표식처럼 무명을 거스르지 않고, 그저 구르는 말은 제 수명을 다하면, 기억 밖으로 내 던져진다. 내가 사랑한 방식은 그러했고 내가 망각하는 방식 또한 그러했다.
가삿말이 어려운 노래는 운전을 하며 듣는다. 이유는 이해 못 할 고백 같은 말들을 그저 흥얼거리기 위해서다. 고백의 말은 정확하면서도 예민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렌즈 없는 흐릿한 시선으로 하늘을 보듯, 성긴 체로 가사를 걸러 노래한다. 이 흐릿하고 뿌연 노래 속에는 강한 의지도, 결연한 마음도 남겨 두지 않는다. 낡고 오래된 사전 속의 어렴풋한 단어를 찾듯이 기억을 더듬거린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의 끝에서는, 그 말을 이어야 할 또 다른 말을 찾듯, 영원한 끝말잇기가 계속된다. 거대한 사랑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찮게 사용해 버리면, 그 말은 닳고 닳아서 흩어질 듯하다. 말에는 종착지가 없다. 말은 가까운 곳에도 머물고 상상의 세상에도 간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다면,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 될 일이다.
“바람에 날아갈 왕겨 같은 말이구만...”
땅을 일구는 친구에게서 듣는 이 말은, 제 스스로 순응해서 알곡처럼 채워진다. 말과 마음이 닿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껍질만 남은 말로 가슴이 허전할 때면, 나는 알곡을 까불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더 깊이 땅을 갈고, 물결의 때를 살펴 그물을 던지기 위해, 사람을 살리는 노래를 듣기 위해 간다. 그렇게 나는 말의 힘찬 근원 속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