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롭고도 찬란했기에

by 이채이

그것은 절정의 순간에 얼어버린 미라 같았다.

서리 직전의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마지막의 때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절정과 죽음이 겹쳐서 오는 사태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의 꽃송이는 제대로 펴지지 않았고 갇혀있던 향기는 단숨에 시들었다. 안에서 뭉쳐있던 향그런 것들이 꽃잎을 녹이고 새어 나왔다. 피우고 싶은 소망이 꽃대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아득했다.


'서른까지만 살고 싶다'는 여자가 있었다. 늙고 추레한 상태로 사는 것은 덧없다 여겼다. 서른은 그녀에게 미의 절대적 마지노선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극치의 순간에 그 아름다움을 박제해 두고 싶어 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녀는 언제나 젊고 극한의 미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단번에 꺾여버려야 했다. 늙어가는 그녀를 남기는 건 금기였다.


'서른 까지만 살 거예요' 그녀는 말했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서른에 맞춰진 타이머 같았고, 남은 생은 정직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랑도 이별도, 한 번의 그리움조차 기적처럼 뜨거워졌다.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모를 순간은 세상에 남은 최후의 장미를 취한 듯 설레었다.


꽃대에서 들이킨 물이 꽃잎으로 번져, 은은한 향을 남겼다. 이것이 장미에겐 절체절명의 미스터리라고 했다.

꽃들이 벌을 유인하기 위해 끈적한 달콤함을 뿌리는 것은 잔인하다고도 했다.

저 혼자서도 자손을 잇는 생식법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암수가 교접하는 수고로움을 겪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제 와서야 그 말뜻을 알 것도 같다.


강의실 창가에서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그건 다짐 같은 것이었다. 봄이었던가 가을 아침이었던가,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그 다짐이 서늘해서 맹세처럼 들렸다. 간간이 '기필코'나 '반드시'라는 부사어가 들려왔다.


창은 한 방향만을 향해 열려있다. 그곳에 갇히면 정해진 곳만 볼 수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나와 그녀가 갇힌 곳은 기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열린 창에서만 사랑이 걸어왔고, 바람처럼 그리움이 불어왔다.

그녀는 그 창이 있는 곳으로 성큼 내디뎠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부재만 남아 있는 계절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그녀의 날들은 사라진 것들을 불처럼 할퀴고 있었다. 잡히지 않는 기억을 태우다 쓰러졌다. 재를 뒤적이면 돌에 새긴 노래처럼 명확한 그녀의 맹세만 차가웠다.

그녀의 마지막은 서른을 향해 충실히 걸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고 싶다고 했다. 무엇하나 더럽히지 않고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불을 더럽히는 화장을 하지 말고, 땅에 묻어 흙을 오염시키지 말고, 물에 뿌려 물의 신성함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다.

침묵의 탑에 올려져서 새들의 먹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가장 정화된 마지막을 가고 싶다고 소망했다. 그녀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속(異俗)의 기억을 잊게 한다는 전설의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삶과 죽음의 경계는 또렷해졌다. 죽음을 실체화하는 일은 그녀를 달아오르게 하는 힘이었다는 걸 알았다.


서른이 되어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꽃다운 계절을 갈망하던 봄은 본능처럼, 위태롭고도 찬란했기에. 늦가을에 당도한 그녀는 이제, 미라처럼 말라버릴 아름다움을 소망하고 있다.


그녀의 타이머는 첫서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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