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늘

by 이채이

당신의 그늘에 머무는 것이 좋았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늘을 만든다'라는 그 말이 마음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황량한 들판에 나를 세워두지 않고, 말없이 그늘을 만들어 주는 당신이 고마워서 나의 눈은 늘 젖어 있습니다.


하혈이 멈추지 않는 한 밤의 응급실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손을 잡아주던 당신, 아랫배를 따뜻하게 어루어 주던 순간은 알 수 없는 것들이 울컥거리며 새어 나옵니다. 사람의 그늘에 온화한 바람이 분다는 것은 과학적 설명에 미치지 못할 테지만, 당신의 온몸에서 뿜어지는 것은 부드러운 온기를 지녔습니다.


손수 구덩이를 파고 심어준 많은 꽃들이 잔가지를 냅니다. 잔가지의 지지대를 세워주었던 당신의 마음이 덩굴 아래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장미가 봉오리를 내밀고 수천의 꽃등을 밝혀서 사방이 향그럽습니다. 당신의 그 꽃그늘이 향을 뿜어서 아침의 홍차가 달콤해졌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에 취해 보았습니다.

못 마시는 소주에 취해 훌쩍거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한다길래, 정해진 계단을 밟아 걷듯 그리해 보았던 것입니다. 여행에 취해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익숙한 땅이 약속한 것들을 마다하고, 온 세상이 저물도록 시무룩해질 때까지 헤매었습니다. 이국의 땅에서 내가 가장 취한 것은,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이렇듯 내 모든 취기의 시원은 당신이 만든 그리움의 그늘이라는 것을, 당신을 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숱하게 밀려오는 방랑의 물살에도, 당신이 만들어 준 장미의 그늘은 언제나 귀환을 앞당겼습니다. 떠나고 돌아옴에 초연하고 그저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습니다. 슬픔도 휘발되고 나면 그리움으로 남게 되듯이, 추억은 온갖 기쁨의 씨앗을 만들어 당신의 정원에 뿌려졌습니다.


싹을 내미는 것들의 명랑함에 기대어,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는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섬이 좋았는지, 어느 산이 멋졌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가장 머물고 싶은 곳은 영혼의 들썩임마저 잠재우는 당신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천 송이 장미가 동시에 피어나는 놀라운 소란에 마음이 들끓어 오릅니다. 사방에 그득한 향은 나를 가볍게 공중에 띄우고, 햇살 아래 툭툭 튀어나오는 슬픔을 이내 털어버리게 합니다. 내가 여기서 인생의 한나절을 지냈다는 것이, 당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의 총합으로 더해져서 행복해졌습니다.


돌아보면 내 번민은 '나'라는 이름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끝내 당신의 품 안에서 용해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들고 오는 아침이 좋습니다. 나의 들뜬 영혼을 녹여줄 설탕 한 스푼과 달아오른 마음을 식혀줄 바이올렛 한 송이. 이것이 당신이 차려주는 아침 식사입니다. 바게트가 바삭해서 나의 마음은 기쁨에 겨워 오그라듭니다.


오늘, 장미의 그늘에서 홍차가 유난히 뜨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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