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계(戒)를 내려주신다

by 이채이

눈알이 염색되었다. 운문사의 부처님 앞에 가면, 은행나무 아래서 노란 계(戒)를 내려주신다. 노랑이 눈 속으로 스며들자, 마음이 빙긋 웃었다. 계를 받아 든 손은, 단청의 옅은 흔적처럼 푸르게 번진다.


노란 계가 발동하는 날부터 달포 간은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첫 계율이다.

긴 겨울밤 책장을 넘길 때, 계율은 허물어지고 터져서 법도를 따른 가을의 것들이 방안 가득 차오를 것이다.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마당은 그대로 두어라. 한 잎 한 잎 주워 창호 위에 끼워두라.

폭설로 길이 끊긴 날이면, 그 잎 하나가 꽃처럼 마음을 데우리라.

늘어지게 열매를 매단 모과나무에게는, 아침의 기쁨으로 합장해 빛을 영글게 해라.

바닥을 뒹구는 모과는 가을을 먹고 겨우 잠에 들었으니, 거두지 말 것.


두 짝 신발을 벗어두고, 평온을 밟아 오싹오싹 대지의 온기를 그대로 마실 것.

수다스러운 은사시나무의 추임새는 잠시 멈추게 할 것.


찬가를 부른 뒤엔 노오란 단감을 두어 쪽 먹을 것, 그리고 뒷간에선 몸속 가득한 것을 송이송이 따내어 놓을 것.


김이 오르는 고구마 속살의 따끈함까지 음미하고 나면, 황금빛 노을을 잠시 바라볼 것.

가만히 초를 켜고, 한 점 노란 불꽃에 시선을 머물게 하라.

지상의 모든 노랑을 모아 눈알 깊숙이 넣을 일이다.


노란계를 들고 마을로 향하는 발끝이 들뜬다. 바랑 가득 늦가을마저 탁발할 것이다.

시간에 무릎을 꿇은 노인들처럼, 흙벽 아래 머물며 그림자를 다독여라.

가을에는 겨울을 대비하는 들쥐가 색을 모으듯, 멍하니 태양을 향하고 그 빛을 잉태할 것.


계의 완성은 네게 있지 않고, 뜰에 선 나무 끝의 홍시에 있다. 마음을 들켜버린 홍시는 가을 속으로 낙하한다. 가을 오후에는 계를 수행하는 비구니처럼 광주리 가득 무엇이건 물들여 올 일이다.


핏발이 진한 눈알을 빼서 씻으면, 치자의 물이 우러난다.

순간, 색색의 눈을 지닌 고양이가 되고, 우리는 우연처럼 겨울로 걸어간다.


당신의 가을에도 빛이 내려오는가. 계를 받아 서서히 물들고 있는지.

오늘, 당신은 어떤 빛으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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