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도 오롯이 말려둡니다

by 이채이


철새들이 분주히 돌아옵니다. 북쪽 서리를 피해 용케 저어 왔습니다. 북풍을 맞고 바스라지던 몽골의 독수리들은 거친 알타이산맥의 눈사태처럼 옵니다. 성공한 비행은 논바닥 가득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눈보라를 깃에 묻힌 채, 여유롭게 내려앉습니다.


머물 곳을 스스로 선택한 자의 당당함이 빈 하늘에 떠 있습니다. 독수리가 높은 하늘에서 표류할 때면 거대한 날개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자유는 가끔 외로워 보이는데, 한겨울의 적막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종일 먼 곳만 바라봐야 하는 날에는 그리움이 들끓습니다. 그런 날은 무담시로 당신에게 보내고픈 하찮은 것들을 꺼내 봅니다. 어느새 바지런히 준비한 가을을 보자기에 싸고 있습니다.


늦여름에 씨를 뿌린 김장무는 독 속에서 익어갑니다. 시래기가 좋아 말린 무청은 여전히 푸르고, 겨울 아침 시래깃국으로 당신의 빈 속을 덥혀줄 겁니다. 솥 안에서 시래기가 삶기고 잘 묵은 된장이 풀어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시락국을 떠먹으며 햇살 좋았던 늦가을을 떠올리길 바라봅니다. 달팽이나 여치가 잠시 쉬어가는 그늘을 만들어 주던 친절이 된장처럼 풀려 훈훈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내 거친 밥상을 책임지던 가지도 잘 말랐습니다. 가지 줄기가 당신만큼 자라, 손끝으로 겨우 높이를 헤아렸습니다. 꽃이 핀 채 겨울이 올까봐 조바심을 냈고, 늦가을에 열리는 가지를 보면 어린 모습으로 일찍 철들어버린 당신 생각에 쓸쓸해졌습니다. 고루 말린 가지를 먹을 때, 나의 쓸쓸함을 기억하지 말고 당신의 기쁨만 불려서 살캉하게 맛보시길 바랍니다.


찰진 밥에 곁들인 호박고지를 먹을 때면 누군가의 보고픔도 응축되어 있음을, 그것이 당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나의 암기법임을 잊지 마세요. 독성이 있다는 아주까리는 잎을 삶아 말려두었습니다. 독으로 고통을 치료하듯 당신 마음에 아픔이 깃드는 날이면, 여린 잎을 꺼내 수행하듯 오래오래 볶아보세요. 말라붙었던 눈물이 자작하게 우러날 것입니다.


나는 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화에서 도태된 현생인(現生人) 같습니다. 방학 숙제로 해내던, 곤충이나 식물 표본처럼 어쩜 나도 현생 도태의 표본으로 남을 듯합니다. 나조차도 나의 삶을 납득시키지 못합니다. 아스팔트 위에 사는 내게는 그 층위 아래 근원을 갈구하는 씨뿌리는 자의 오랜 습(習)이 남아있습니다. 유목민 같은 삶을 살면서도 기르고 거두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볕이 아까워 사랑도 기쁨도 오롯이 말려둡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소박한 것들은 한 계절을 지나면서 갈무리한 나의 글이라 여겨주길. 토란 잎은 은밀한 지붕 아래서 온전히 사랑했던 풀벌레를 회상하는 나의 회상록 같은 것입니다. 따글따글 영글어가던 꼬투리가 터지고, 사방으로 튀어버린 용감한 콩알까지 기억하는 기록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소산은 말라버린 잎사귀가 아니고, 가을의 열기가 보전된 태양임을, 당신을 향한 나의 시(詩)임을 당신은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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