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의 가르침

by 이채이

괜스레 마음 가는 것이 있다. 자꾸만 생각이 나고 이끌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이 간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 내게는 숲에 들어앉은 집이 그렇다. 나는 요즘 통도사의 암자에 자주 간다.


부처님 전에 가는 건 아니고, 절집 마당에 선 늙은 은행나무가 말없이 잎을 떨구는 모습을 보러 간다. 암자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이 만든 아치 사이로 부는 바람을 만나러 간다. 미소의 의미를 깨달은 삼소굴(三笑窟)과 그 곁에서 절정에 달한 산수유의 붉음을 배우러 간다. 그곳 바윗돌에 앉아 연기가 피어나는 적막한 순간을 느끼곤 한다.


산의 적막이 좋았다. 나는 절집의 아침과 밤이 그려내는 수묵담채화를 좋아한다.


정적은 먹으로 눌러 찍듯 그려진다. 고요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움직이는 살아있는 것들이다. 마지막까지 매달린 은행잎이 노랗게 채색되고, 알알이 박힌 산수유 열매가 마침내 붉은 연기처럼 채워지면 담채화는 생명을 얻는다. 적막은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 먹과 채색 사이에, 차분하게 고여있다.


절집에 사는 스님들이나 절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마음이 사는 집에 고요를 들어앉히고 싶어 한다. 고요가 들어찬 수묵담채화가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마음은 좌선의 정수리에서 척수를 타고 흘러내린다.


인도 불교의 윗빠사나 명상에는 묵언 수행이 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 안에서 들끓는 것들을 가라앉히고 적막하게 비우는 과정이다.


묵언은 삶에서 먹물을 회수한다. 인간은 입 안에 먹물을 그득히 머금고 산다. 입을 여는 순간, 그 먹물은 사방으로 튀어 누군가를 검게 적신다. 말이란 본래 그런 먹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쏟아서는 안 된다.


묵언은 그 먹물을 다시 먹 속으로 가둔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오래 가라앉힌 한 방울만을 꺼내 쓸 때, 말은 상처가 아니라 의미가 된다.


말은 뱉는 순간 누군가에게 닿아 상처가 되고, 내게는 허물이 되어 남는다. 먹물을 삼키듯이 말을 아껴야 한다. 먹을 삼키고 또 삼켜 더는 뿜어져 나올 기운조차 닳아 없어질 즈음이면, 비로소 붓을 들어 혀에 남은 먹물로 그림을 그린다. 적막의 그림이 배어나면, 묵언은 완성된다.


인간의 혀에서 구부러져 나온 소리가 꼭 말은 아니다. 묵언을 하다 보면 절 마당의 향나무도, 담장 너머 배롱나무도 묵언 중임을 안다. 영축산의 목어도 하늘의 운판도 모두 수행 중임을, 그리하여 단청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그리도 그윽했음을 안다.


말하지 않을 때, 오히려 가장 많은 말을 이해하게 된다.


당신을 만나 빙그레 웃는다. 그 소리 없는 뜻을 당신이 알아주면 좋겠다. 미소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없어 아무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그 진심이 말보다 먼저 당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오는 봄, 삼소굴에 산수유가 필 것이다. 오래 삼켜 가라앉힌 말이, 산수유 꽃망울로 노랗게 물오르면 좋겠다. 말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말없이 고요를 산책하다가, 적막 속에서 잠시 미소 짓고 가면 좋겠다.



*삼소굴(三笑窟)은 통도사의 극락암 안에 있는 암자 방 이름으로, 삼소(三笑)’라는 이름은 ‘세 번 웃음’ 혹은 ‘깨달음의 웃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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