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진척이 없을 때는 부엌을 정리한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면 반쯤 남은 무나 당근 동강, 싹이 나려는 양파, 냉동실에 얼려둔 셀러리가 있다. 복잡하게 엉킨 냉장고를 정리하면 요리가 하고 싶어진다. 무채 나물을 만들고 당근을 채처서 레페를 버무린다. 셀러리는 토마토 스튜에 넣어 이국적인 맛을 낸다. 나는 요리라는 행위가 주는 수행적 순간과 작은 성취의 충만을 종종 느낀다.
우울한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겉절이를 한다. 얼갈이배추를 뽑고 흐르듯 씻어서 가볍게 무쳐낸다. 아삭한 식감과 날 것 그대로의 고춧가루나 마늘의 맛이 난다. 아직은 어색한 친구처럼 멋쩍지만, 아삭함 속에 묘한 생기가 돈다. 양푼에 밥과 겉절이를 넣고 참기름을 한 바퀴 휘 두르면, 가장 싱싱한 비빔밥이 된다. 우울함은 신선한 것을 먹으라고 몸이 보내는 은근한 신호인지도 모른다.
냉장고 한켠에는 꼭 말라서 쪼글 해진 감자가 있다. 싹 난 감자의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겨서 깍두기처럼 썰어서 볶는다. 간장과 조청을 넣어 약간 달콤하게 먹으면 다운되었던 기분이 포근포근해진다. 감자 싹의 푸르스름한 빛은 독이면서 생명의 눈이다. 감자는 푸른 독을 품고 다음 생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내가 마음의 간절한 독기를 품고 내일의 문장을 견디듯이.
몇 잎 남아 있는 잎채소는 모아서 샐러드를 만든다. 아까운 버터헤드는 살살 찢고, 양배추는 얇게 썬다. 단감 껍질을 벗겨 얄팍하게 저미고, 올리브 오일과 송로버섯 병조림을 조금 넣으면, 깊고 풍성한 맛의 샐러드가 된다. 샐러드가 입안에서 씹힐 때 송로버섯은 땅속 깊은 곳에서 응축된 향을 지상으로 밀어 올린다. 마음속 캄캄한 굴로 자꾸만 숨어들고 싶은 날, 나는 송로버섯을 먹는다. 머릿속의 어지러운 감정들이 그 향 하나에 가지런히 놓인다.
한때 싱싱했던 채소들도 오랜 냉장고 생활에 지쳤는지 바깥의 공기를 좋아한다. 아까운 채소는 가장 맛있을 때 먹는 게 좋겠지만, 다람쥐가 숨겨둔 알밤을 하나씩 꺼내듯 오래 모아둔 식재료를 처치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개운하고 머리가 말끔해지는 느낌이 든다.
"냉장고 한 번 털어볼까?"
이 말은 마음의 먼지를 털듯 나를 가지런하게 하고 싶은 순간임을 안다. 요즘 나의 기분은 자주 펄럭였다. 겨울 같은 흐릿한 마음이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냉동고의 흑임자를 꺼내서 죽을 만든다. 쌀과 흑임자가 뒤섞여 갈리고 마음의 근심도 함께 갈린다. 겨울 아침이 분명한 오늘, 따끈해진 죽 한 그릇을 함께 나눌 사람이 문득 떠오른다. 죽 속에서 세심하게 분해된 나의 마음을 천천히 읽어내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깨닫는다.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마음을 다시 세우는 일은 언제나 가장 다정한 일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