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의 유언 - 겨울 창가에서

by 이채이

애지중지 기르던 제라늄이 죽었다. 장마와 무더위가 숨통을 죄었고, 꽃잎 아래로 뜨거운 수증기가 차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염증이 많으면 복수(腹水)가 고여 몸이 무너지는 사람처럼, 제라들도 줄기에 물을 가둬 서서히 병든다. 땡볕은 견디면서도, 목마름을 달래려 삼킨 물 한 모금이 오히려 독이 되는 식물.


내겐 애지중지 기른 세계 각국의 진귀한 제라늄이 많았다. 일조량이 부족한 겨울에도 꽃을 피우도록 인공 태양을 설치하고 곁가지를 잘라 수십수백의 삽목을 했다. 한 송이 꽃을 보기 위해 그리 애를 쏟았다.

퐁파두르 부인의 치맛자락을 연상시키는 자태, 분홍 설탕을 입힌 알사탕 같던 동글동글한 모양새, 겹겹의 모란이 피어난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들까지.

그녀들 모두의 이름을 다 기억 못 하지만, 그녀들을 대하던 나의 진심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제라늄은 아름답지만 허무한 식물이었다. 더 이상 소생 불능의 상태가 되면 마지막을 지탱한 토분에서 제라늄을 뽑아낸다. 뿌리는 끝까지 토분을 휘감아 놓지 않는다. 흙을 털어 가지런히 놓아 장례를 치르고 나면, 빠져나간 자리만 텅 비어 허전하다.

햇빛 구걸하지 말라고 달아둔 인공 태양 아래서도, 끝내 눈물을 흘리며 생을 마감한 꽃들. 죽어가는 꽃들을 뽑아서 버릴 때면 마음의 빈자리가 더 아팠다.


꽃들에게 묻는다. 어찌하면 될까. 피지도 못한 채 다물어버린 꽃망울이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도자기처럼 섬섬하던 꽃잎은 와그르 무너지고, 급류에 휩쓸린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아이만은 던져 살려내듯, 제라는 단 하나의 줄기를 살리고 서서히 시든다.


소식을 듣고 조문 온 나비나 벌들도 잠시 머물다 갈 뿐, 깊이 애도하지 않는다. 함께한 짧은 시간에 나는 새잎이 나는 설렘과 꽃봉오리가 터지는 절정의 순간을 함께 했다. 행복했던 일상이 그리움의 통장에 일수처럼 찍혔다면, 지금은 그 적금을 조금씩 깨며 견디는 중이다.


나는 겨울 창가에 있다. 찬바람이 유리창에 매달려 하얀 입김을 불어댄다. 찬기운이 스며든 베란다에서 꿋꿋하게 피어있는 꽃들을 본다. 죽어가는 제라의 몸에서 성한 줄기를 떼어, 다시 살려보려 한다.

나의 목마름을 참으며 너를 목마르게 할 것이다. 토막 난 줄기의 표피에서 마침내 뿌리가 생겨나고 잎이 돋으면,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쉴 것이다. 살아난 너를 자랑하며 그리움의 통장에 일수 도장을 다시 차곡차곡 쌓을 것이다.


무언가를 살린다는 것은 상처를 덜어내고, 새살이 돋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일이다.

사랑에도 아픔이 있고, 슬픔에도 희망이 남듯이, 절망뿐이던 제라늄이 남긴 말은 결국 하나였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내라. 그리고 어느 봄날, 해사하게 다시 피어나라. 너도 그렇게 다시 오라고.


꽃이 진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공기의 틈으로 햇살이 빼곡하고 구름 사이로 비의 음성이 들린다. 꽃들의 죽음은 수의를 입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월의 봄 소풍처럼 가벼운 기대감으로 다가오고,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내겠다는 다짐을 햇살처럼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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