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간을 넘어오는 방식

by 이채이

손맛은 기억을 데우는 힘이 있다.

누구나 가지고 싶지만, 쉬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 그건 손맛이다. 손맛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따뜻하게 데우고, 나를 먹여 기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텃밭의 싱싱한 무나 당근 같은 채소에는 그리움이 쑥쑥 뽑혀 나올 것이 분명하다. 손맛에는 그리움이라는 천연의 맛이 묻어 있다.


손맛은 전생을 불러내는 심령술사의 주술처럼 척척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다듬고 썰고 오래 끓이는 요리의 전 과정에 참여하고, 간을 하는 중에 절로 몸에 배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날 찹쌀풀을 쑤고 김을 붙여 만들던 김부각은, 고소하고 바삭한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곁을 지켜주었다. 머윗대를 삶아 쓴 물을 빼고, 고사리와 채소를 듬뿍 넣어 끓이던 어머니의 장어탕은 힘든 여름날을 견디게 했다.


어느 해 겨울 초등생 딸아이가 끓여준 미역국을 기억한다. 엄마 몰래 장을 보고 미역을 불리고, 수십 번 간을 맞춰 끓여낸 생일 국이었다. 남편과 아이 둘이서 보글보글 끓인 것은 미역국이 아니라 나의 맛을 재현하는 노력이었고, 식탁에 차려진 것은 오래 기억될 행복한 순간이었다.


봄이면 바지락 쑥국도 끓이고 쑥버무리도 만들어 먹어야, 비로소 봄이 온다고 믿는 분이 어머니다. 어머니는 쑥버무리에 호랑이 콩을 설기설기 넣어 쪄서 보내신다. 짭조름하고 쌉싸래한 그 맛이 어쩐지 달게 느껴진다.

남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던 올갱이 해장국을 내게 설명하며, 비슷한 맛을 내줄 수 있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맛본 적 없는 음식을 상상력에 기대어 끓여냈다. 남편은 만족해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해장국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마법의 조미료가 가진 강력한 맛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음식을 제법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가기 어렵다. 평생토록 그 맛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음식을 할 때, 모두가 맛있다고 끄덕이는 순간에도 나는 갸웃하며 만족하지 못한다. 자꾸만 어머니의 맛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서다. 본향을 잊지 못하는 여우처럼, 나는 흐릿하고도 선명한 맛의 기억을 향해 길게 고개를 드리운다.


딸이 내 음식의 맛을 기억해 가며 간을 맞출 때면, 손맛이라는 것이 어떻게 전승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전승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인간문화재에게만 허락된 일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의 부모가 자녀에게 살아갈 힘이 될 음식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일, 그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오래 남는 전승일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음식에는, 험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 있다. 손맛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딸이 끓여낸 미역국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 나는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손맛의 농도를 느낀다. 손맛은 잊고 있던 추억을 다시 데우는 일이며, 사랑이 시간을 넘어오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 사진은 '량랑이'님의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라늄의 유언 - 겨울 창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