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해피엔딩을 좋아할까.
나 역시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편이라, 이 의문은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꺼낸 이야기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종종 다시 이어졌다.
카페지기는 말했다.
“실제 삶에서 갈등을 너무 많이 겪기 때문 아닐까요?”
사과받지 못한 채 끝난 오해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어정쩡하게 남겨진 감정들, 그리고 매달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
이런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드라마 앞에 앉는다. 갈등 속에서 허우적대는 삶이기에, 잠시라도 그 밖으로 물러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순간에 만나는 새드엔딩은, 겨우 내려놓은 짐을 다시 들어 올리게 만든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잘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고 싶은 건 아닐까.”
해피엔딩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버텨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최소한의 보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를 닫아버리지 않고 시청자를 현실로 고이 돌려보낸다. 비극은 이해를 요구하지만, 해피엔딩은 안심을 허락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사람들이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건 삶이 이미 충분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간 행위의 최종 목적이다”라고 말한 철학자처럼. 인간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고통을 설명하는 이야기보다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이야기를 더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로 해피엔딩을 ‘선택’하는 것일까, 아니면 해피엔딩만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삶이 이토록 버거운데도, 따뜻한 이야기보다는 악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는 악이 극단적이고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일상적이어서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채 우리가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야기에서만큼은 더 분명한 끝을 바라게 된다. 악을 충분히 경험하되, 마지막만큼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해피엔딩이 확실한 <모범택시 시리즈>는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야기가 끝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시청하는 동안 마음을 지탱해 준다. 그래서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 말이 과연 취향에 대한 고백이었을까. 아니면 더 이상 상실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마음의 항복이었을까.
다시 묻는다.
〈프라하의 연인〉은 정말 해피엔딩이어야 했을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아픔을 견뎌온 끝에, 새드엔딩조차 버텨낼 여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