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차로로 주행하세요

by 이채이

연말정산을 하러 학교에 갔습니다.

두 번째 가보는 곳이라 길이 낯설어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고속도로에 올라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 30분 남짓이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평일인데도 도로엔 거대한 물류 차량이 넘쳐 위험했습니다.

네비는 분홍색 차로를 따라가라며, 도착할 때까지 내가 안심하고 운전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길을 일러주었습니다.


며칠 전 연말정산을 위해 행정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나이스 인증서가 없는 저는 절차를 몰라 주무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읽으면 다 안다며 100페이지가 넘는 파일을 보냈습니다.

휴직 중인 경우가 궁금하다고 했지만, 거기 다 나와 있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서류 어디에도 답은 없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건 그는 해보니 자신이 할 수 있겠다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직접 학교를 찾았습니다.

분홍색 차로를 따라 운전할 때만 해도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카톡으로 이런저런 연말정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행정실에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나는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멋쩍은 얼굴로 덧붙였습니다.

보내준 파일에 다 나와 있다고요.


나는 USB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렸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혼잣말 같은 탄식을 흘렸습니다.

한참 후, 이 일은 자신이 아니라 교감이 해야 한다며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남에게 전가하는 데 능숙해 보였습니다.

해명은 길었고, 설명 위에 또 다른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구차한 말에는 늘 정당화가 길게 따라붙는 법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다만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시골 학교는 한산했고 민원인은 나 혼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담당자였지만, 이 일이 처음이라며 몇 번이나 선을 그었습니다.

그 앞에 선 나는 사람도 물건도 아닌, 먼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 모습이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조직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몫조차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현장체험학습의 모든 책임이 교사에게 돌아가던 시절, 나 역시 그렇게 작아졌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을 지우려는 그의 태도가 불친절하게 느껴졌고, 동시에 가여웠습니다.


결국 연말정산은 못 하고 돌아오는 길, 내비게이션은 또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녹색 차로를 주행하라고요.

사람의 불친절과 기계의 친절이 묘하게 어색했습니다.

이제 다정함조차 인간보다 기계에 더 어울리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순간, 인간으로 남는 일은 불편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도진이찐아빠의 것을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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