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존재이유였다 <금각사>
우리는 모두 이해받기를 원한다. 사회생활이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고 인정받는 과정이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누군가가 내 생각을 온전히 알아주고, 나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줄 때, 우리는 마음 깊이 위로를 얻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이해받고자 애쓰고, 남들과 비슷해지려 노력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 여긴다.
이해한다는 것은 대상을 내 인식의 틀 속에 통합하는 일이다.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이미 내 안에 그것을 담을 그릇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 인식의 틀이 유동적일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통합할 수 있다. 반대로 인식의 틀이 작고 고정되어 있다면, 그 좁은 틀에 갇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세계의 경계는 곧 내가 가진 인식의 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내가 완전히 이해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남들이 나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틀 속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나만의 고유한 결을 잃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남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오히려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군중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나는 비로소 내 길을 걷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모두가 공유하는 생각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존재의 위안을 찾으려는 사람은 결국 군중 속의 고독을 피할 수 없다. 무리 속에 있을수록 자신의 길을 찾기는 어렵다. 다수의 의견은 언제나 평균값으로 수렴하며, 평균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남쪽 바다에서 길을 잃으면 남십자성을 보고 방향을 잡는다. 북쪽 바다에서는 북극성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방향은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고정된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군중들의 분분한 의견이 아니라 내 안의 확신이다. 그러므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해야 한다. 다수와 다른 생각을 해도 괜찮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 그 다름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은 논리적으로 구조화된 사실들의 총체다.'라고 사유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자신이 쓴 글이 이해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인정받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가진 인식 틀로는 자신의 사유를 담아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그의 글은 설명이 없다. 해설이 없다. 그저 간결한 명제들만 존재한다. 언뜻 보면 수식 같고, 기호 같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타인의 이해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천재 철학자가 이해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 또한 타인의 이해 속에서 살아가려 애쓸 필요는 없다. 모두를 이해한다고 장담하는 자들의 인식은 얕고 폭이 좁다. 좁은 우물에서 누군가를 논할 때, 나는 나의 땅을 넓고 깊게 파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들의 비난은 피할 일이 아니라 무시할 일이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가끔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