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말

by 이채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단순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직업이나 가족 관계, 성격 유형 같은 것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

“저는 간호사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에요.” “첫째예요.”


그러나 그런 말들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짜 대답일까? 20대 초반, 사르트르의 책에서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근사한 말’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오십을 넘긴 지금, 나는 그 말의 진심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가꾸는 것이라는 걸. 스스로 씨앗을 심고, 돌보며, 자라게 하는 존재라는 것. 나라는 정원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는 결국 나의 몫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교사’라는 나무를 돌보며 살아왔다. 그 정원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안의 또 다른 씨앗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질수록 풀벌레의 소리가 유난히 크고 깊어지듯, 내 안에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너는 어떤 존재로 살다 가고 싶은가?”


그 무성한 물음에 답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책은 내게 새로운 씨앗을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언어, 고통과 기쁨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내 안에 아직 틔우지 못한 씨앗이 있다는 것을. 그 씨앗은 ‘작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내게 그런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건 오롯이 내가 선택하고, 내가 심고, 내가 키우기로 한 씨앗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삶을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실제로 정원을 가꾸고 꽃을 키우면서 이 깨달음을 더 깊이 경험하고 있었다. 처음엔 잡초투성이었던 마당이 계절을 지나며 하나둘 꽃을 피웠고, 내가 돌본 시간만큼 정원은 달라졌다. 그걸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나도 내 안에 이런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 정원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내 안의 정원 역시 그렇게 가꿔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랐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건 너답지 않아.” “넌 원래 그런 스타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선택이다. 내가 어떤 씨앗이든 선택해서 심을 수 있듯이. 얼마만큼의 꽃을 피울지는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담아 가꾸는지에 달려 있다. 누구는 장미를 심고, 누구는 들꽃을 키운다. 누군가는 대나무처럼 오래 기다리는 대숲을 기른다.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원하는 것을 심고 돌보는 것이다. 그 정원을 가꿀 사람도, 만개의 기쁨을 누릴 사람도 결국 나 자신이니까.


존재는 언제나 본질에 앞선다. 존재는 씨앗이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다. 그 땅이 어떤 아름다운 존재가 될지는 내가 심고 가꾸는 방식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부터 내가 누구든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오늘도 내 정원에 뿌릴 새로운 씨앗을 고르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나를 더 나답게 만든다. 잣나무가 잣나무이듯,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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