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세상. 그 속도를 따라가려 하면 오히려 생각이 멈춰버린다. 무딘 사고의 날로는, 섬세하게 변화하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세상을 감당할 수 없다.
매일 쏟아지는 놀라운 진보 앞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내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그 순간, 나는 대낮의 태양 빛을 피해 숨는 음지의 동식물처럼 맥을 못 추고 만다. 흙만 먹고사는 지렁이처럼, 그저 자신을 방치한 세월이 부끄럽다.
나는 왜 독수리가 되지 못하고 지렁이가 되었을까?
독수리는 하늘을 날며 세상을 한눈에 조망하는 존재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자유로운 정신과 창의성으로 바람을 타며 나아간다. 독수리는 높이 날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는지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감지한다.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어느새 땅속에 파묻혀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지렁이가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무지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했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무지의 관성대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알지 못한 채, 어리석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요즘은 회사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당신이 AI에 대체되지 않을 것을 증명하시오.”
AI는 이미 법률 자문, 의료 진단, 예술 창작까지 넘보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 앞에 자신의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질문 앞에 서면 나는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처럼 느껴진다. AI 앞에 선 나는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존재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그 답답함은 상상이 아니라 실화다. 눈뜬 사람들을 이끄는 장님이 있을까? 장님은 ‘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할 수 없고, 귀머거리는 변화의 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지금, 그 직설적인 불구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심봉사가 개안할 때 치른 대가처럼 큰 값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창의성이라는 날 벼린 칼을 들고 산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안에도 그런 창의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 번도 ‘창의성’을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 창의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고, 학교에서조차 구체적 실체로 존재한 적 없는 추상명사였을 뿐이다. 교육으로는 순응만 익혔지, 도발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 안주의 대가를 나와 후손들이 치를 것이다.
창의성은 교육의 울타리에 한 번도 진입하지 못한 채로 나는 반세기를 살았다. 지천명에 들어선 지금, 창의성을 무기 삼아 살아남으라는 천상의 명령 앞에 섰다. 그 명령은 강력하고 무섭도록 설득력이 있으나, 죽창 하나로 조총부대를 맞서는 농민군의 심정만큼 처참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예전 방식으로는 논할 수 없는 새 길, 새 방법이다.
“우리는 문제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사고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늘 아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건네는 충고다. 창의성은 꼭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만은 아니다. 창의성이란 익숙한 것에 질문을 던지는 불편함이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낯선 관점을 견디는 힘 같은 것이 아닐까.
인공지능의 기억력, 계산력, 정보 활용은 이미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누군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만 같은 절망감에 몸서리를 친다. 그 상자의 마지막에 슬며시 얼굴을 드러내는 ‘희망’처럼, 이제 우리에게 희망으로 남은 건 단 하나. 질문할 수 있는 감각,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힘뿐이 아닐까.
어느 틈엔가 창의성은 질문이라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제 남다른 질문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나는 그 생존의 칼을 벼려야 한다. 녹슬어버린 내 정신의 도마 위에서. 나는 과연 인간으로 살아남아, AI와 공존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을 타고, 내가 가고 싶은 세계로 갈 수 있을까?
한때 나는 책을 마법의 양탄자라고 믿었다. 그러나 요즘은, 마법의 양탄자는 책이 아니라 AI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온다. 내가 올라탈 양탄자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나는 여전히 지렁이일까, 아니면 이제 독수리를 꿈꿔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