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를 좋아하시던 엄마는 봄, 가을이면 잊지 않고 주꾸미를 사 오셨다.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주꾸미를 손질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생생하고 끔찍했지만, 흘리는 피가 붉게 튀지 않는다는 점이 나를 안심시켰다. 한 생명의 뇌와 내장이 일순 제거되고 개나 고양이라는 포유류의 먹이로 던져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는데, 육지에 적을 두지 않은 생물이 가진 운명적 한계로 여겨졌다. 붉은 피를 흘리지 않는 이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덜 잔인하게 느껴졌다.
낙지 주꾸미 문어. 이들은 인간의 생김새와는 다른 낯선 동물이다. 이들의 생김은 먼 외계의 생명체를 떠올리게 한다. 머리에서 가슴, 배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흐름 없이, 이들은 머리에서 곧장 다리로 이어진다.
어릴 적 주꾸미를 먹으면, 머리와 다리 사이에 붙어있는 음험한 눈이 늘 미심쩍었다. 그리고 뇌와 다리가 곧바로 연결된 신체적 특성에는 그 종이 가지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으리라고 의심했고,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다. 여러 개의 다리는 뇌보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가지고 있어서 다리 스스로 감지하고 판단하고 기억해서 행동한다.
각각의 다리는 뇌의 명령 없이 촉수가 가진 기억으로 독립적인 행동을 한다. 두 개의 다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동안, 나머지 다리는 도망칠 준비를 한다. 이 다리들은 하나의 유기체인 동시에, 각자 판단하고 협업하는 ‘개별적 지성’이다. 나는 이 생물의 독립적 활동이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한데, 뇌가 통제하지 않는 움직임은, 어쩐지 기괴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족류에 대한 기억은 개별 음식으로 저장되어 있다.
대학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간 나를 위해 친구 어머니는 낙지를 통째로 넣어 맑게 끓인 연포탕을 내놓으셨다. 나박나박 썰어 넣은 무가 시원한 맛을 내고 갯벌 어딘가에서 오랜 세월 잘 숨어 지내던 낙지는 빨판을 뒤집은 채 말려있었다. 가위로 듬성듬성 썰어주는 연포탕을 한 사발 먹으며 질기고도 부드러운 몸을 가진 낙지의 최후에 대해 생각했다. 그 최후는 낙지의 삶으로서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대자연의 이치에서 살필 때는 합당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포항에선 대왕문어가 잡힌다. 붉게 삶아진 대왕 문어가 가판대 위쪽에 걸린 광경은 죽도 시장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왕 문어는 인간의 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통으로는 먹을 수 없고 편으로 썰어 먹어야 한다.
머리에 먹물주머니를 넣고 늘 경계하던 문어도 인간이 설치한 항아리나 통 앞에서는 자제심이 무너진다. 문어가 들어가면 통발을 끌어올리는데, 통발은 크고 튼튼해서 힘센 문어조차 도망치지 못한다.
대왕문어는 빨판 사이사이 묻은 이물질과 점액을 솔로 잘 닦아내야 하는데, 때 묻은 운동화를 솔로 빨듯이 그렇게 거칠고 정성스레 털어내야 한다. 나는 이 거대한 문어의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근육과 뇌의 기능이 공존하는 거대한 다리를 앞에 두면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꺼려진다. 그것은 식재료 라기보다는, 경험 못한 외계의 지능을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에선 ‘뽈보’ 요리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돌문어보다 더 크고 두터운 문어를 삶아, 야채와 함께 올리브 오일에 구워 낸다. 이국의 식탁에서 만나는 문어 요리는 왠지 덜 잔인하게 느껴진다. 어릴 적부터 식탁 위에 올라왔던 주꾸미나 낙지와 달리, 전승된 조리법과 낯선 풍미가 거리감을 만들어준다. 뽈보 요리를 먹을 때는 두족류에 대해 가지는 민족적 죄책감이 확실히 덜하다.
생김새도 삶의 방식도 우리와는 다른 생명을 먹는다는 일은, 종종 낯섦을 감수하는 용기와 훈련된 무딤을 요구한다. 그 무딤이 부족할 때는, 한 입조차 마음에 걸린다. 나는 지금도 대왕문어 앞에서 젓가락을 망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