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계는 시간을 담을 수 없다
'시계의 가치보다 시간의 가치가 더 비싼 삶을 살아라'라는 말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라는 단언이다. 세상에는 값비싼 물건이 넘쳐나고,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황금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물건으로서의 가치에 충실하지 않은 부의 상징이 되었다. 시계는 시간을 재지만 그것이 삶의 본질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시간은 숫자로 환산되지만, 삶은 감각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을 수치로 나타내는 건 가능한 일일까?
삶의 의미는 얼마로 책정하는 것이 적절할까. 한 번은 80년 인생을 돈의 가치로 환산해 본 적이 있다. 이 어리석은 셈법의 덧없음을 알지도 못한 채, 계산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저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성정 탓에, 어찌해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나름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으면 모든 것은 형상을 잃는다. 사물이 사물로 선명하게 보이는 한, 나는 분명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영화 <루시>에서 모건 프리먼은 묻는다.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영화 속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를 무한대로 올리면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
“시간만이 진정한 측정 단위이며 존재를 정당화한다.”
스칼렛 요한슨이 그렇게 인간 존재의 비밀을 말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시각’이라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각’이라고 해보면 어떨까. 이미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를 ‘시간 지각(time perception)’이라 부른다.
나는 좀 더 주관적인 감각으로서, 뇌가 구성해 내는 내면의 시간 인식을 ‘시간각’이라 부르고 싶다. 시간각은 ‘살아 있다는 감각’, 혹은 ‘시간이 나를 지나가고 있다는 체감’에 가깝다.
한밤중, 정적이 모든 것을 덮을 때 문득 찾아오는 이상한 감각,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인식, 그것이 바로 시간각이다.
시간각은 외부 자극과 무관하게 내면에서 감지되는 생명의 리듬이다. 체온과 맥박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체감할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살아 있음’이 빚어내는 주관적 리듬이기도 한 것이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시간각’을 느끼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어서. 오히려 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기 존재의 상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무엇이든 붙잡고 싶어 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순간에야 우리는 비로소 겸허해진다.
시간이 무의 성질을 가졌다면, 그 최초의 시작 또한 ‘무(無)’의 형상을 지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창조된 것은 창조자의 본질을 닮기 마련이니까.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이 ‘공’이라면, 우리는 ‘무’에서 시작해 ‘시간’을 거쳐 다시 ‘무’로 돌아가는 순환의 한복판에 서 있다. 숨이 멈추는 순간 시간도 멈춘다. 그러므로 시간은 곧 숨이며,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시간의 지배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무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결국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