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는 과거 선택의 총합이다. 이 말엔 내가 감내한 숱한 갈등과, 그로 인한 회한이 함께 담겨 있다. ‘선택(選擇)’이라는 말은 흔하다. 무엇을 고를지, 오늘 점심 메뉴조차도 우리는 ‘선택한다’라고 말한다. 가볍게 입에 올리는 이 말도,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무겁고 진중한 뜻을 품고 있었음을 잊고 있다.
선택의 선(選)은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이 글자를 들여다보면, 고대 제사에 누가 동참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제관이 여러 사람 앞을 조용히 지나며 고심했을 장면이 그려진다. 탁자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이, 숨을 죽이고 택함을 기다리던 순간 말이다. ‘선(選)’이란 글자는 그런 신중하고 조심스러움을 지녔다.
‘택(擇)’은 손과 눈을 함께 품은 글자다. 눈으로 살피고, 손으로 골라낸다는 뜻처럼, 택은 유심히 보고 오래 만져본 끝에 내려야 할 행위였다. 섣부른 선택은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었기에, ‘택’ 역시 신중하고 너그러운 눈으로 분별해야만 했다.
선택(選擇)이 이런 뜻을 지닌 두 글자의 합이라면, 내 삶의 선택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저 일신의 이익과 안락에 맞게 세심하게 조준된 것이 나의 선택이라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선택이란, 나 하나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모두를 향한 물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선택을 말할 때의 선(選)은 매몰차지 않다. 주저하는 선, 길게 여운을 남기며 긴 호흡으로, 조심스레 내뱉는다.
반면, 택(擇)은 단호하다. 선과는 달리 뭔가 마무리 짓고 확정 짓는 강단이 느껴진다. 택! 마치 의사봉을 두드려 내용을 확정 짓는 듯하다. 선이 망설임의 미덕이라면, 택은 책임의 결단 같다.
이렇게 보면 선택(選擇)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권리이자, 때로는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너그러움이 아닐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나는 그 결정이 결코 가볍지 않기를 바란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순간일지라도, 그 선택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소망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의 총합이다. 내가 총합의 결과라면, 나는 갈림길마다 좀 더 명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했다.
부끄러운 지난날 앞에 나는 독백 같은 다짐을 반복할 뿐, 과거를 돌이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의 선택이 또 한 번 어리석은 결과로 이어질지라도, 오늘의 결단만은 가볍지 않기를...
나는 여전히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