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과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이 『도로고』에서 남긴 이 구절은, 18세기 지리학자가 길을 단순한 통로가 아닌 ‘존재의 자리’로 인식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후대가 사족을 붙이지 못할 만큼 길에 대해 명료히 서술했다. 제 두 다리를 움직이고 의지를 불태워 평생을 걸었을 지리학자의 눈에 길이란 무엇이었을까.
늦은 밤의 어둠도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도 청년 신경준은 길 위에서 맞이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젊었고 발걸음은 힘차고 주인 없는 길을 가는 주인이었을 것이다. 가는 자만이 주인이 되는 공평한 곳. 오직 주체로 걸을 때에만 고독조차 허락되는 공간.
그가 둘러 살피던 곳의 옛길은 강을 따라 나 있었고, 길이 산을 가르지 않았다. 돌고 돌아 흐르는 물처럼, 길도 산을 따라 우회하였으되 사람의 발길은 이어졌기에 길은 길로 존재하였다.
신경준이 말한 주인 없음의 길을 주인 있음으로 길로 바꾸는 마법은, 오직 길을 가는 자가 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문병란 교수님을 만나 지산동 산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요즘 엘리베이터는 인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손에 짐이 많아 가방 모서리로 버튼을 누르면 완고하게 고집하며 작동하지 않는다. 올라가야 할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두어 번 눌러도 안 되면 팔꿈치로 누르게 되는데 사람의 체온이 닿을 때 비로소 숫자등이 환해진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이러한 인간적임이 마음에 든다. 인간의 소유물에게 길을 허락하지 않는 그날 아침은 빙긋 웃음 지을 수 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인간미를 상실해 가는 요즘, 인간이 아닌 물질에서라도 사람다움을 느끼고 싶다는 대화였다. 길이란 반드시 지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같은 수직 상승의 길이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길을 걸으며 시상을 모으노라고 하셨는데, 밤길을 걷다 올려다본 하늘가에서 직녀를 생각했다. 그의 시는 노래가 되었다.
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하기 전까지 삶의 메모를 남겼다. 그 메모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짤막한 대답으로 여겨졌다.
오래오래 피려하지마라
붉게붉게 타려하지 마라
:
사랑이여,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
빛깔은 시들고 향기는 썩는다.
문병란 시인의 길은 오래되고 이미 경험된 과거로의 길이며, 천천히 더듬으며 되짚어 봐야 할 길이며, 오래오래 피려하지 않는 길이고, 붉게붉게 타려고 애쓰지 말아야 할 길이다.
오래오래 피려한들 붉게붉게 물들려고 한들, 빛깔은 시들고 향기는 썩는 법이라는 그의 대답은 깊다.
신경준의 길이 앞을 향해 걸은 미래적 길이라면, 문병란의 길은 지나온 흔적을 조용히 되짚는 회고적 길이었다.
오늘의 우리는, 길 위에 있지만 진짜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러닝머신 위에서 30 분째 걷고 있는 나는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달리는 동안의 숨가픔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이토록 정확히 계산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걷고 있지만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달리면서 침투하는 육신의 고통은 생생한 날것이라 내 것이 분명한데도, 제자리를 헛달릴 뿐인 내 모습을 보면 문득 애처롭다. 나는 그저 정지한 바닥 위에서 겨우 사지를 흔드는 중이다. 그럼에도 '나는 달리고 있다'라는 근원 없는 위안을 받을 수는 있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말해주는 신경준의 말, 오래오래 피려하지마라는 문교수님의 시. 둘 다 내가 걸어가야할 길을 가리키는 보배로운 말로 받아들인다.
내 걸음이 향하는 곳이 길이 되고 내 망설임마저 길 위에서 의미가 된다면, 나는 오늘도 걸을 수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답게’ 가는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