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새벽녘의 독서는 곧장 눈을 시리게 한다. 가만두면 눈물이 흐르고, 각막이 뻑뻑해진다. 처방받은 안약을 넣고, 그래도 불편하면 인공눈물을 떨어뜨린다. 몸이 만들어 내는 눈물과 같은 농도로 만든 물이지만, 눈은 그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이질적인 물이 닿을 때 눈은 시큰하게 반응하고, 눈물은 천천히 퍼지며 진정된다.
시림이 심해지면 눈을 감고 누운 채 쉰다. 이상하게도 감은 눈에도 세상이 보인다. 눈이 본다기보다는, 밝음이 감각을 뚫고 들어온다. 그저 빛의 잔상일 뿐인데도, 그것마저도 위안처럼 느껴진다.
내 눈은 오래전부터 약했다. 중학생 때 처음 흐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안경을 쓴 사람은 드물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안경은 허세와 선망이 깃들인 대상이었다. 어두운 빛 아래 책을 읽다 보니 눈이 닳았는지 형체가 흐릿해졌다. 그때부터 안경은 내 눈의 일부가 되었고 유리알 너머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결국 눈이란, 빛을 굴절시켜 상을 맺는 살아 있는 렌즈여서 수정체가 굳고, 망막이 지치면, 세상은 점점 뿌예진다. 나의 눈도 그렇게 무뎌진 것이다.
안경은 끝내 나의 눈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유리는 빛을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다. 어지러이 간섭하는 빛은 시신경을 타고 뇌에 당도하여 마침내 두통을 자극했다. 눈이 욱신거리다 못해, 머릿속까지 울렸다. 유리알에 의탁해서 세상을 봐야 하는 내 처지는 고통스러웠다.
뭔가를 읽어야 하는 한 두통은 멈추지 않았다. 안경을 벗으면 눈은 시원해졌고 쓰리고 고통스러운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었다. 두통을 견디며 읽었던 수많은 책 속의 문장은, 어쩌면 그 아픔 위에 새겨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두통은 단 하루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흔을 앞두고, 나는 수술을 결심했다. 각막을 레이저로 절개해 뚜껑을 열고, 빛의 굴절점을 다시 조정하는 수술이었다. 듣기만 해도 오싹하고 무서운 과정이었지만, 더는 두통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수술 다음 날, 창밖의 나뭇잎이 선명하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태초의 나뭇잎을 처음 본 사람처럼 경이롭고 낯설고 눈부셨다. 이후 10년, 나는 보는 것의 고통에서 잠시 자유로웠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 가서 백내장, 녹내장, 황반변성, 망막혈관까지 죄다 검사했다. 대부분 정상이었다. 눈의 침침함은 과학의 영역에서 측정하는 기술의 결과와는 별개로 현실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다. 눈은 정상이라도 일상이 뿌옇다. 의학적 진단과 체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불편함 앞에서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아무래도 내가 겪는 침침함은 감각 바깥의 감각 같다.
쉰 줄에 들어 눈이 흐려지자, 나는 비로소 무심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수십 년간 눈을 혹사했다. 어두운 방에서 글을 읽었고, 현란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왜곡된 유리 뒤에 고단한 눈을 외면했으며, 각막에 칼을 댔다.
지금도 글을 읽고 쓰느라 눈은 쉴 틈이 없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눈을 몰아붙였던가.
요즘은 책도 사진을 찍어 확대해서 읽는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려야 글자가 선명해진다. 새벽 독서에도, 밤 독서에도 눈은 쉽게 지치고 무른다.
그럼에도 눈은 여전히 관대하다. 시리고 아프면서도 빛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보게 해 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아직도 희미하게 세상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