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by 맥문동

우리 집 김치냉장고가 오늘 밤 운명을 달리했다.


15년 전 결혼 혼수로 장만한 중저가 가전제품이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 모델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7년이라는데, 우리 가족과 7년 하고도 8년을 더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람 나이로 치면 약 120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치냉장고는 사람처럼 마음을 줄 수는 없을 테지만, 내게는 결혼 혼수로 들여온 모든 물건들이 여느 집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 이상으로 애정이 깊은 소중한 보물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간간히 “시집갈 때는 혼수는 벌어서 가라”라고 하시던 가난한 아버지의 말씀이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당연히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되었다. 30대 초반에 혼수를 내손으로 모두 벌어서 손수 장만한 것들이라 더욱 애틋했던 것이다. 마흔 후반인 지금도 우리 집에는 내가 준비했던 혼수품이 여전히 남아 있다. 흠집이 있는 일반 냉장고와 나무껍질 문양으로 된 필름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한 장식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벌써 15년이나 된 것들이니, 처음처럼 마냥 산뜻하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직장생활로 육아로 집안 청소로 힘들 때마다 나의 든든한 아군이었으며, 한결같은 내편이었다. 큰방에는 6단 장롱과 거실 장식 세트와 큰맘 먹고 산 피아노는 아직도 건재하다.(직장생활 11년을 하고 결혼했기에 가능하다.)


남들은 몇 년이 지나면, 편리함과 기분전환으로 전자제품이며 가구를 바꾸기도 한다지만, 나와 함께 중년이 되어버린 혼수품들은 친정식구들 같아서 요즘 트렌드와 달리 칙칙해도 항상 제자리에 있어줘서 고맙기만 하다. 오래되고 익숙한 전자제품과 가구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친정 같아서 좋다.


우리 집 한켠 비좁은 다용도실(아파트 특성상 다용도실 입구가 너무 좁아 이사 올 때 세탁기를 해체해서 들여다 놓고, 다용도실 안에서 다시 조립함)에 갇혀 있다시피 한 세탁기가 요새 들어 부쩍 노쇠해 보이지만, 내색 없이 제 할 일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친구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답답할까 봐 낮에는 아파트 복도식 복도로 통하는 햇빛이 비치는 다용도실 유일한 작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 주곤 한다. 겨우내 춥다고 창문을 꽁꽁 닫아 놨더니, 배수구 쪽에서 역한 하수구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의 손과 팔이 되어준 충실한 나의 세탁기 덕분에 아마도 나는 정해진 내 수명보다 더 오래 살 것 같다.


매년 시어머니께서 김장김치를 해주신다. 감사인사를 드리고 바로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저장한다. 이상하게도 똑같은 김장김치인데, 시댁을 가면 우리 집보다 시댁 김장김치가 훨씬 더 시원하고 더 맛있다. 내 직장생활 때문에 관리가 소홀해서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어머니는 전자제품 조작을 잘하시고, 나는 전기와 관련해서는 젬병이다.

시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시는 데다가 전기와 기계조작 능력이 탁월하시다. 최근에 내게는 없는 운전면허증까지 취득하셨다. 옛날과 다르게 전기제품 활용은 곧 요리 솜씨와도 직결되는데 내 경우에는 전기제품은 간신히 플러그만 꽂고 빼는 수준이다. 어쩌면 11월 겨울에 주신 김장김치 맛이 다음 해 3월 봄까지 항상 생 김치 맛 그대로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우리 집 김치냉장고가 힘들어했던 것을 몰랐다. 말썽 한번 피지 않던 터라 조용한 줄로만 알았다. 밝은 햇살이 베란다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온 주말에 아침 찬으로 김치를 꺼내보니, 주홍빛으로 맛있게 신맛이 도는 숙성된 냄새가 물씬 났다. 배추 포기김치 중간중간 틈에 성큼성큼 썰어 넣었던 새초롬한 납작한 무를 한입 베어 무니, 달달하다. 침이 고인다. 익은 맛도 깊어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절묘하다.


가 식어가는 차가운 온기로 따뜻하게 품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2018.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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