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합의 하에 외면된 ■■

by 저소음

뒤에 그림자가 하나 있다. 그 그림자는 나의 작고 까만 흔적이다. 그것의 형체는 누가 봐도 무척이나 볼품없는 생김새임이 분명하다. 그림자의 하찮은 생김새는 특별히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무언가를 암시한다거나 남모르게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그런 모양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 있기 때문에 그림자는 작고 까말 뿐, 그림자가 그렇게 생긴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해가 기울면 그림자는 내 뒤로 길게 늘어져 내 발끝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해가 지면 그림자는 가로등 빛에 여러 갈래로 나뉘거나 어둠에 가려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그림자의 모양새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그림자가 까만 이유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나의 몸에 닿았고, 나의 몸에 가려진 부분이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그 존재원리가 확실하고 학술적으로 명확한 설명이 가능한 자연현상이다.


물론 내 그림자가 작고 까맣다는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그림자를 관찰하는 것을 그만둔 지 꽤 되었기에 지금 내 몸에 붙어있는 그림자가 어떤 모양인지, 무슨 색인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그림자를 돌아보는 시간은 같은 길을 달리는 타인에게 추월의 계기를 준다. 혼자 느긋하게 걷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 누군가의 꽁무니를 쫓아, 누군가의 꿈을 좇아 달렸다. 이제 내가 걷는 길은 뒤쳐지면 안 되는 레이스로 느껴졌다. 속도를 늦추고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 하나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깅을 하듯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그림자는 작고 까만색이었다. 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아마 내 그림자도 비슷한 모양새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뒤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요즘 들어 자주 나타나는 증상인데, 아마도 환청의 일종일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뇌에 이상이 있어 환청이 들린다고 한다. 어렴풋이 나도 뇌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오늘은 환청이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억눌린 울음소리는 바닥에 길게 늘어져 바쁘게 움직이던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느려지지 않기 위해 그대로 빠르게 걸었다. 울음은 더욱 격렬해져서 이제는 아래턱이 박살 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괴기하게 들려왔다. 그 피 끓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환청을 떨치려고 했지만, 그림자는 계속해서 바짓단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달리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졌다. 그림자가 타르처럼 끈적하게 바닥에 눌어붙었다.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밟아버려 앞으로 거꾸러졌다. 코와 턱이 깨질 듯 아팠다. 발을 디딜 수가 없어 무릎과 손을 이용해 기었다. 도로 위에 잔뜩 깔린 유리조각이 피부를 갈라 살을 파고들고 깊숙이 박혔다. 그 틈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머리 위에 태양이 있고 나에게는 달려야 할 길이 주어져 있으므로, 그러나 기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는 잔뜩 일그러진 형체의 검은 인영이 있었다. 그 얼굴은 주파수가 약한 홀로그램처럼 아버지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 형제자매의 얼굴, 한때 마음을 주었던 사람의 얼굴, 길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봤던 사람의 얼굴 등의 살아오면서 봤던 수많은 사람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신분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입으로 악을 쓰며 울음을 내질렀다. 익숙한 얼굴들이 넋 놓고 우는 꼴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고개를 돌려 길옆에 토했다. 입에서 토가 쏟아져 나왔다. 조준을 잘못했는지 머리카락에 토사물이 잔뜩 묻어서 얼굴 옆에서 고약한 위산 냄새가 올라왔다. 위에 들어 있던 것을 토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멀쩡한 척하며 달리려고 했지만, 결국 여기서 무너지는구나 싶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갑자기 괴형체가 행동을 멈추었다. 지금 보니 그 그림자의 얼굴은 바로 내 것이었다. 눈물 자국도 안 닦고 멍하니 있다가 피식피식 웃는 내 모습이 무서웠다. 내 그림자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난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름대로 자아 성찰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 그림자는 이렇게 망가져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나. 이렇게 생각하자 그림자가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는 또 어떤 점을 고쳤어야 했나? 그림자에게 묻자 갑자기 그림자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이었던 것이, 다시 온갖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 죽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징징거리지 좀 마. 마음에 안 드니 잘라버리자. 그림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사지를 떨며 발광하던 그림자가 생명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다리도 좀 길게 늘이자. 그러자 늘어져 있던 그림자의 다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다시 달릴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토사물을 주워 입에 넣었다. 내 머리카락에 붙은 잔해도 열심히 핥아 몸으로 집어넣었다. ‘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같은 길을 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는 같다.’ 마지막으로 늘 하던 것처럼 주문을 외우자 내 발에 달린 그림자는 같은 길을 달리는 사람들의 그림자처럼 작고 까만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모르는 것은 많다. 내 주변에 보이는 작은 그림자들도 이런 식으로 작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자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문득 유난히 발광하며 자신의 상황을 투정하는 내 그림자가 미워졌다. 남들과 같은 해를 쬐고 있는데 왜 내 그림자는 이 모양인가. 왜 조금의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울어버리고 마는 것인가. 나약함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내 뒤에 있던 그림자의 크기가 더욱 작아졌다. 이제는 그림자가 자기주장을 하기 위해 다리를 붙잡는다는 상상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것은 발끝에 까만 테두리가 되어 간신히 붙어있었다. 그림자를 완전히 없애고 싶다. 그러려면 빛을 비추는 해를 없애거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그림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제거해야 한다. 내 몸은 남들보다 크게 태어나 그림자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큰 덩치를 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벌떡 일어나 옆의 강에 몸을 던졌다.


사인은 환청 및 환각에 의한 자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림자는 그 존재원리가 확실하고 학술적으로 명확한 설명이 가능한 자연현상이다. 그림자가 평면에서 튀어나와 그림자의 주인을 공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작가의 이전글「탑건: 매버릭」- 완벽한 속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