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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23. 2024

첫눈에 반한 사랑(비스와바)

나누고 싶은 詩

첫눈에 반한 사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초인종이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출처: <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문학과 지성사, 최성은 옮김)



<단상>

아름답고 낭만적인 영화를 보는 듯하다. 시절 인연이 무르익어야 만난다. 무르익기까지 함께 스쳤던 시간, 공간들을 상상해 본다. 혹시 정말, 수화물 보관소에 여행 가방이 나란히 있었을까. 그리고 ‘그날’은 시작이 아니고 ‘계속’의 연장이라고 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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