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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식판과 나무 함지

by 제리

해마다 섣달이 되면 집에서 제일 큰 가마솥이 가득 차도록 쌀밥에 엿기름물을 부어 따끈따끈하게 아궁이에 불을 넣어가며 삭힌다. 식어도 안 되고 삭기 전에 끓으면 망하는 거다. 밥알이 쫙 떠오르면 잘 삭았다는 뜻이니 광목 자루에 퍼담아 쳇다리에 올려 꽈악 눌러 짜 건더기는 버리고, 남은 단물을 밤 새 졸이면 조청과 엿이 된다. 여기까지는 시어머니의 몫이고, 설 준비의 시작이며 이제부터 난 죽은 목숨이다.

뜨거운 엿에 볶은 땅콩과 참깨를 넣어 콩가루가 뿌려진 쟁반에 한 국자씩 떠서 굳히는 땅콩엿을 시작으로, 쌀 강냉이를 조청에 버무려 양손 가득 뭉치는 쌀강정, 검정콩을 튀겨 엿과 함께 동글 납작하게 만드는 콩엿, 따뜻한 조청에 설탕 한 숟갈과 볶은 들깨를 섞어 비닐이 깔린 상에 쏟아 방망이로 얄팍하게 펴서 마름모꼴로 자르는 들깨 강정과, 소금과 생강즙으로 간을 한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로 잘라, 세 줄 칼 집을 넣어 한번 꼬아 기름에 튀겨내는 매작과 까지. 매일 매일 만들어지는 대로 광에 있는 독 안으로 들어갔다.

광에는 온갖 농기구들이 걸려 있고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커다란 철제 드럼통이 두 개, 쌀 두 가마는 너끈히 들어갈 큼지막한 독이 여러 개 있었다.

설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음식도 늘어간다. 식구는 반의반 토막이 났어도 떡쌀은 줄이는 게 아니라는 시어머니의 지론에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가래떡 서말을 썰어야 했고, 인절미와 조망생이는 행담에 차곡차곡 담아 광에 있는 드럼통 위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꽁꽁 언 인절미와 조망생이는 겨울밤 화롯불에 석쇠를 얹고 부풀도록 구워 조청에 찍어 먹는데, 겉은 약간 탄 듯이 바삭바삭하고 양손으로 쥐고 반으로 가르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달콤한 팥과 쫄깃쫄깃한 맛이 세상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때쯤 살얼음이 잡힌 식혜 항아리도 광으로 들어간다. 이렇듯 온갖 음식이 광으로 옮겨지는데 다식을 담은 나무 함지는 안방 벽장으로 간다. 하얀 쌀다식 갈색 콩다식 노란 송화다식에 까만 흑임자다식까지, 색깔별로 채워 창호지를 덮어 벽장 안에 넣는다.

다식은 고운 가루를 조청으로 반죽해서 다식판에 박아내는데, 언제나 흑임자가 문제였다. 검은깨를 볶아 곱게 빻아 조청으로 반죽해 놓으면 금방 굳어 딱딱해진다. 놋주발에 담아 뚜껑까지 덮어 아랫목에 묻어 놓고 조금씩 떼어내야 하니, 다른 세 가지 다식보다 시간은 몇 배나 더 걸렸고, 끝나고 나면 엄지손가락이 며칠 동안이나 시큰거렸다.

밀가루 포대가 들어온다. 만두 해야지ㅠㅠ

밤에 안방에서 만두를 빚어 마루에 펼쳐놓은 교자상으로 옮겨 대각대각 소리가 나도록 얼면, 광주리에 담아 광으로 간다. 설날에 끓일 만큼만. 나머지는 매일 새로 빚는다.

보름달이 뜰 때까지 쭈욱.

하루에도 열두 번씩 세배 오는 사람들 다과상과 술상을 차려내고 떡국을 끓여야 한다.

아! 지친다. 친정은 언제 가나.

광에서 인심 난다고 퍼내기 시작하면, 광을 채웠던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비워진다. 내 젊은 날 몇 번의 겨울은 이렇게 광에 처박혔다.

얼어 죽은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집을 지어 이사하니 광 대신 창고가 생겼다. 벽장이 사라졌고 엿 고을 가마솥도 없다.

공장에서 나오는 각 잡힌 엿을 사서 강정 만드는 흉내만 낸다. 콩가루에 굴렸던 인절미와 조망생이는 하얀 녹말가루로 분칠을 한 찹쌀떡으로 바뀌었다. 세배 오는 사람도 줄었고, 커피 한잔이면 끝난다.

가래떡은 썰어서 포장된 걸 부녀회에서 가져다주고, 두부집에선 원하는크기대로 잘라준다. 섣달이 돼도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바삭바삭 고소하고 다디달았던 맛에 대한 기억도 흐려졌다.


세상이 변했고 사는 곳은 또 바뀌었다. 공간이 보이지 않으니 한 세대만 더 건너면 광이라는 말조차 잊혀지겠지. 남은 건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어쩌면 그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때부터 안방 벽장을 지켰을 낡은 다식판과 나무 함지뿐이다.


섣달 그믐이다.

깨끗하고 달디단 무 하나와 노란 알배추 하나를 나박나박 썰어 고춧물 곱게 나박김치를 담그고,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들기름 내 고소한 만둣소를 꽉꽉 채운 만두 한 쟁반이면 설 맞이 준비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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