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유월이면 탁구공만 한 청매실을 사서 칼로 일일이 조각 내 장아찌를 담그거나, 빨간 연지 찍고 충분히 익어 과즙이 넉넉하고 간지러운 향이 물씬 풍기는 남고 매실을 택배로 받아 비정제원당으로 청을 담그는데, 한 해 건너 번갈아 해서 이리저리 나누고도 다 먹지 못해 냉장고에 자리만 차지하고 들어앉아있다. 앞으로 삼 년은 매실 안 산다. 오월의 다짐이 무색하게 샐러드드레싱에 더할 나위 없다고 약을 팔아대는 매실 농부의 매실퓨레 선전에 낚여, 참지 못하고 왕특매실 5키로를 덜컥 주문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샐러드는 해먹지도 않는 주제에 퓨레가 궁금해서 매실을 5키로나 샀으니 이걸 어째. 걱정 한 보따리 끌어안고 애면글면하는데 브런치 스토리에 <일본 시어머니의 매실잼 >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그렇지! 매실은 일본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잘 해먹을 것이니 나도 이참에 따라쟁이 노릇 한 번 해보자. 해결 방법이 생겼으니 룰루랄라 글을 읽는데, 이렇게 한다고? 이건 뭐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내 발등 찍게 생겼네.
<매실잼 만들기 >
알이 굵은 시퍼런 매실을 사서 깨끗한 물에 두 시간 동안 담가 쓴 물을 뺀 다음, 그 물을 버리고 매실이 잠기도록 다시 물을 부어 중불에 올려 반드시 매실이 두세 개 떠오를 때 불을 끈다. 네 개가 떠오르면 그 시어머니에게는 세상의 종말이 온단다. 대여섯 시간 동안 그대로 식혀 물을 따라버리고 또다시 물을 부어 여섯 시간 동안 우려 내기를 세 번 반복한 다음, 씨와 껍질을 싹 발라내고 그라뉼 설탕을 넣어 약불에 졸이면, 코딱지 만한 병으로 한 병 얻어먹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난리가 나는 매실잼이 된단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물 갈아주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니 이틀은 걸리겠네.
아우! 그냥 안 먹고 말지, 맛있다고 난리가 나지않아 천지개벽을 한대도 이 짓은 못하겠다.
포기하려다가 아니지 이건 매뉴얼에 목숨 거는 일본 사람들 이야기고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는 하고 있지 않을까? 녹색창을 열어보니, 그럼 그렇지 있었다!
그것도 빨리빨리 민족답게 그 길고 지리한 과정을 한데 묶어 전기밥솥에 두 시간 보온으로 끝내고 씨와 껍질을 발라내 설탕 넣어 졸이기만 하면 끝이다.
이정도면 할 만하지. 가벼운 마음으로 매실을 박박 씻어 전기밥솥이 아닌 오이지 담글 때 소금물 끓이는 8리터짜리 곰솥에 넣고 물 2리터를 부어 가스렌지 위에 올려, 솥이 따끈따끈해 질때 까지 기다려 불을 끄고 그대로 식혀 물을 따라버리고 반 나눠 퓨레와 잼으로 완성했다. 맛있다고 난리가 날 정도는 아니고 여러모로 쓸모는 있을듯했다.
올해는 이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실 철 다 지난 어느 날 저녁나절, H마트에 들어서는데 왼쪽으로 노천매가 쌓여있었다. 매실과 자두의 교잡종인 노천매는 속살까지 피자두 같은 자줏빛으로 아름다운 붉은색 청을 얻을수 있고, 맛도 시어터진 매실보다는 새콤달콤한 자두에 가까워 몇 개쯤 그냥 집어 먹을 수 있다. 몇 년 전 보자마자 홀딱 반해 청으로 담갔었는데 바로 그 매실이 눈앞에 쌓여있고 값도 싸다.
택배로 10키로 삼만 오천 원씩 샀었는데 한 상자 만 구천구백 원이다. 올해는 매실 그만 사야 하는데 욕심은 나고, 이걸 어쩐다...망설이는데 직원이 다가와 이건 술 담는 매실이지 청 담는거 아닙니다. 청이 안돼요. 딱 잘라 말했다. 쳇, 세상에 젤 무서운 사람이 서울 한 번 가 본 놈이라더니, 남대문 문지방이 박달나무라고 우겨대면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 몇 년째 그 매실로 청 담그는 사람 앞에 두고 청이 안 된다고? 자~알 되거든요. 하려다가 아, 네 하고 돌아섰다.
첨 보는 매실이네...신기해서 구경하는 사람마다 붙잡고 청 안됩니다를 외치니 그걸 누가 사나. 팔겠다는건지 말겠다는건지, 어느 대단한 술꾼이 있어 매실을 10키로씩이나 술을 담그겠냐고요!
그거 팔기는 다 틀렸다. 두고 봐라.
며칠이 지나도록 팔리지 않은 노천매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삼천 원짜리 가격표를 옆구리에 붙이고 초라하게 쭈그러져있었다. 아이고 이런. 불쌍한 매실 한 상자 냉큼 카트에 올리는데 그 직원이 어느새 스르르 내 앞에 와 있다. 그리고는 이거 술 담는 거지 청 담는 거 아닙니다라고 또 또 또 초를 친다. 정말이지 팔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는 상 받을 만하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카트에 실린 상자를 열고 잘 익은 매실 하나를 골라 살구처럼 반 쪼개 먹으면서 "이 매실은요 이렇게 씨 빼고 청 담가 과육까지 다 먹는 거예요 "라고 가르쳐 줄 수밖에. 내 말에 그 직원은 이건 뭥미???하는 얼굴로 날 쳐다봤고, 그 다음 날 마트에는 매실이 한 상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입술에 붙은 밥풀도 무겁다는 오뉴월 복지경에 땀 줄줄 흘리며 매실 10키로를 끓이느라 사서 고생하는 내가 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