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유럽인, 독일인인 야콥요한센의 글과 일맥상통하지만, 언어도 훨씬 쉽고 현대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프리터 출신 남자로서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적절히 섞어서, 읽기도 쉽고 술술 넘어갔다.
야콥 요한센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한 프리터 출신 작가의 가벼운 에세이라고 생각했을 듯.
그러나 쉬운버전 복습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글의 결론이 좀 허무하긴 하지만, 뭐 그렇다고 뾰족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일본 영상작품들에 푹 빠지게 되는 길을 열어준 <드라이브 마이 카>가 주요 소재로 나온다는 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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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커>의 아서는 소수자로도 다수자로도 보기 어렵다. 이렇듯 모호하고 눈에 잘 띄지 않고 경계에 있는 약자성이랴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의 최전선 중 하나가 아닐까?
소수자도 아니고 다수자에 속하지도 못하며 1펴센트도 99퍼센트도 아닌 존재.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잔여=無’ 또는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에 따르면 ‘잔여물’인 현대의 약자 남성들.
24 남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의 다수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비판당하고 문책당하고 있다.
한편, 법률, 제도, 가족 안에 남성 특권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 남성들은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고 자유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행복하지 않다는 통계와 조사 결과도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10대와 20대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모든 남성이 기득권이라고 칭해지기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에 비하면' '성소수자에 비하면' 등의 조건을 붙인다면 성립할까? 남성이라 칭해지는 아이들도 자신의 약한 면에 슬픔을 자주 느낀다. 그 슬픔이 세상사, 사회,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화도 나고 극복하지 못할 때는 어찌할지도 잘 모르겠는 답답한 상황이다. 굳이 그렇게 근육을 만들고 운동을 쉬지 않는 것도 자신이 살아나갈 삶의 근육 하나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싶다. 판타지로 구성해낸 누군가의 착취에 대한 분노로 그 불안이 발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남자건 여자건 소수자건 늘 그런 때를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 더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이의 약함에 대한 인정이 '우리 머리 위로 더 큰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조너선화이트의 글 인용) 숨쉬듯 자연스럽게 우리를 감싸 우리조차 그 일부가 되어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수자 남성 사이에 있는 ‘약자’들 (다가 후토시, 남성다움의 사회학)
A. 기본값: 여성에 비해 남성은 사회구조적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우위에 있다
B1. 남성의 제도적 특권: 집단 내 여성의 희생으로 집단 내 남성은 제도적 이익을 누린다.
B2. 남성다움의 비용: 남성들은 제도적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 ‘남성다움’이라는 억압적인 규범에 따르는 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B3. 남성 내 차이와 불평등: 남성들 사이에도 다양한 차이가 있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비용을 많이 지불하고도 이익을 거의 얻지 못하는 남성이 있다.
보이지 않는 약자 남성 - “남성 약자”의 존재에 주목하자
남성들은 가해자, 차별자, 억압자라며 비판받고 반성과 행동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남성들 안에도 다양한 약자가 있다. 그러나 이 존재는 크게 조명받지 못해 국가의 지원과 관심도 없다.
약자성의 예
비정규직 형태의 노동 수입 / 호감을 얻기 어려운 외모 / 스스로 비하하는 소통 능력 문제/
다양한 수준의 발달장애와 정신 질환 문제 / 현실 애인 또는 예비 배우자의 존재 여부
그러나 모호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 선을 그어 분명히 나누려는 행위 자체가 잔혹한 폭력, 지배 행위가 될 수 있다. 선을 나누어 지배한다. 이것은 차별의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이부분! 상황을 납작하게 분류하는 것은 그대로 권력이 힘이다.)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가 전제되자 일부 남성들은 저항하며 약자성의 의식(르상티망 포함)을 강화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 구도 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성을 증폭시키고 ‘안티’ 세력으로 변모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정치적 인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과 성소수자보다 다수자로 여겨지는 남성 내의 약자가 훨씬 더 불행하고 고독하다.
* 현대사회의 진정한 피해자는 남성 약자다. 여성과 성소수자와 달리 약자 남성들에게는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지원과 배려가 단 하나도 없다.
소수자 속성이 없는 남성들은 정치성을 띨 수도 없다. 연대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개인이 충분히 성찰할 여유도 없다. 이렇게 되면 내면의 불행, 고뇌 약함에서 비롯된 마음ml 구멍을 메우기 위해 안티나 인셀의 어둠으로 빠지기 쉽다. 안티와 인셀이 주는 강렬하고 일시적인 감정은 그들을 한 집단으로 묶어주며, 인터넷 전장에서 적과 싸우면 적어도 고양감과 보람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굴욕의 정치”(센델)-능력주의의 그늘: 최근 각지에서 분출하는 포퓰리즘의 배경에는 ‘부정의의 정치’, 즉 정의가 정치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데서 오는 분노의 문제보다는 ‘굴욕의 정치’ 문제가 있다.
세상은 약자 남성들을 반성과 자각이 부족한 우둔한 인간으로 여긴다. 너희들이 우둔하니까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근본적인 굴욕감을 강요받는다. 여러 의미가 중첩된 비정규적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의 약자 남성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적인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약자 남성에게 존엄이란?
내게는 분명 여성 혐오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여성 공포 같은 것이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기 없는 남성에서 공격적인 인셀로 변질될지도 모르는 인간에게 남아있는 존엄을 비폭력적이고 반차별적인 형태로 꺼내고 싶었다. 남자의 약함이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약함이라 주장했다. 또 무지와 무력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질문은 이미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넘어 비정규 남성들, 약자 남성들이 인생관을 어떻게 다시 정립할지.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갈기에 대한 집단적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인정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피해자 의식과 공격성이 생긴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부터.
남성들도 의존할 대상을 늘리자
“자립이란 의존할 대상을 늘리는 것이다.”
스미코구라시. 모든 캐릭터가 사회적 소수자까지는 아니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예민함과 약자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의 주변에서 구석에 몸을 기대어 동료들과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다. 경쟁, 인정, 생산성, 능력주의가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냐는 물음 대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긍정하는 공동체성이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바냐아저씨 /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해”
나의 상처와 약함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연약함이나 상처 입을 줄 아는 마음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는 것, 약함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들의 바람직한 규범이 불안정해지고 유동화되고, 진위와 선악의 기준도 결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남성들은 어떻게 성숙해져야 하는가. 어떻게 정직한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는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첩된 상호텍스트성은 이러한 과제와도 깊게 관련된다. ‘진심’은 가면(겉마음)일까 민낯(속마음)일까 하는 대립을 넘어선다.
남자들은 속마음으로 돌아가 권위적인 아저씨가 되거나, 상처가 깊어져 피해자의식에 빠진 인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던적인, 포스트트루스적인 시대상황을 견딜 수 있는 남성 주체로 성숙해지는 것이 좋다. 비자본주의 형태의 공유경제처럼 상처 일부를 함께 공유하는 공생공간의 힘을 얻은 가후쿠는 자신의 남성성을 천천히 변화시킨다.
언젠가는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을 수 있다든가, 속마음을 다 말할 수 있는 친구들과 취미를 함께 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다든가, 그런 있지도 않은 희망을 꿈꾸느라 현실을 속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그저 지루한 이 일을, 이 인생을,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죽지도 않고 마지막순간까지 이뤄내자. 여기에도 존엄은 있다. 분명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내면에서는 이를 초월하는 한낱 인생의 존엄이 있다.
저자 생각에는, 인셀레프트, 아니면 바냐 아저씨의 길이 약자 남성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고 침체기를 거칠 시기 프리터로 청년시기를 보내며 사는지 죽는지조차 관심없었던 저자다운 생각이다. 특히 인셀레프트는 일본에서 일어났을거라 생각하기도 어려운 1968년 시기 자유주의 또는 공산주의 발흥의 역사적 배경에 힘입어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인셀이 인셀레프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은 현사회에서 실현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 겉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시하게 조근조근 가까운 사람과 지겹지만 살아내는 것. 이 정말 최선일까? 우리 아들들을 생각하면, 참 어렵고도 안타까운 일인데. 그래서 모든 부모들은 아이가 서울의대를 가기를 꿈꾸는 것이겠지. 한국 아이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부모의 꿈과 갈망이 되며, 그것은 '약자' 남성이 아니라 채드가 되어 스테이시를 차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적극적인 압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상위 10퍼센트 인간이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아서, 그에 실패하는 순간 부모의 수치가 되고, 아이는 스스로에게마저 수치가 된다. 이들은 '나의 지위를 빼앗은' 여성들에게 분노하고, 공정한 세상을 약속하는 파시즘을 지지하며 불안에 잠식되고 액체화된 자아에게 방탄복을 장착해준다.
4세고시, 7세고시의 진정한 위험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는 것, 제대로 상처받는 것, 그 상처를 서로 보듬어주는 것.
결국은 또 사랑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상처로 인한 불안을 분노로 전환시키지 않도록, 파시즘으로 무장하여 죽거나 죽이는 일로 뛰어들지 않게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부모는?(양육과정에서의 위니캇, 벤저민 이론 참조)
학교는?(문해력 교육, 섹슈얼리티 다루기, 능력주의 넘어서기, 다양성 교육)
사회는?(모든 세대에 대한 재사회화 시스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낮추기 위한 체제, 선순환구조, 차별혐오금지법 시급히 제정,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스스로는?
제도화된 시스템은 어떻게 세워야 하지? 사회의 선순환적 재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더 찬찬히 생각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