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작은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후 1년 반동안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진로를 달리 정하고 학원에 가게 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출근할 때 태워다주고, 스카에서 공부한 날은 10시30분쯤 데리고 오는데, 이 짧은 시간이 참 소중하다. 뭐든 좀 미루는 습관이 있는 아들은 꼭 10분을 늦는다. 내 학교로 바로 출근하면 30분 정도 걸리는 등굣길이 아들 학교에 들렀다 가면 50분 넘게 걸린다. 7시 10분까지 출발하면 큰 문제가 없는데, (난 7시에 출발하고 싶다) 꼭 10분을 넘겨서 내려온다. 출근시간에는 1분 차이로 거리에 차가 많거나 적기 때문에 제발 좀 10분까지 나오라고 해도 그게 참 어렵다. 결국 난 출근시간에 간당간당 학교에 도착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올해가 끝이다.


아들이 기숙사에 있을 때는 모든 시간을 내게 맞춰 사용하고 특히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아침에 걸어서 전철역까지 가는 게 참 좋았는데, 그리고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한바퀴 돌며 복도 불을 차례로 켜는 느낌을 좋아했는데 당분간 보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들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련한다. 이것도 원래는 집에서 먹고 가기로 했는데, 하루 6시간 이상을 자야 정신을 차리고 살 수 있다는 아들때문에 간단한 주먹밥을 만들어 싸준다. 참치마요, 김치참지, 소고기볶음, 양배추달걀 주먹밥이 간단하고, 가끔 베이컨으로 감싸서 넣어주면 좋아한다. 베이컨이나 햄을 자주 이용하진 않지만, 쓸 때는 뜨거운 물에 데쳐 아질산나트륨과 염분, 기름기를 뺀다. 일본식 유부초밥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조미가 잔뜩 된 일본유부를 사다놓고 가끔 주먹밥을 거기 넣어주기도 한다. 요즘 시도한 것 중에 반응이 좋았던 것은 스팸과 당근을 이용한 무스비,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소고기등심을 혼쯔유와 맛술을 조금씩 넣어 구운 후 당근, 양배추볶음과 함께 김에 말아준 스테이크김밥이었다. (사진을 찍어두자고 다짐하건만, 아침 그 정신없는 시간에 불가했다. 다음주부터 다시 시도해봐야지)


밤에 태우고 돌아올 때는 아들이 그날 새로 알게되었거나 최근 즐겨듣는 음악을 틀어준다. 내 차 블루투스 1순위는 아들이어서, 아들이 타기만 하면 자동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음악 취향이 나랑 아주 유사한 편이라 즐겁다. 좋아하게 된 음악이 나오면 그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서로 이야기한다. 최근엔 같이 듀오로 사용하고 있는 스포티파이에 엄마 들으라고 플리를 하나 만들어주었는데, 60년대 락부터 최근의 히게 음악까지 딱 좋은 음악으로 가득 차있다. 그 중 몇개는 아들이 피아노로 연주연습도 한다. 집의 창밖에 벚꽃이 만개하면 아들이 피아노 연주(주로 지브리 음악)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있는데, 아들이 일본으로 가고나면 벛꽃철에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차 안, 밤의 차 안, 주말의 잠깐씩.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나날들이다.

한번은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피아노 연습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보다가, "너는 나중에 힘든 일이 있어도,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다행이다."했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가 그렇게 키웠잖아요. 잘 키웠어요. 고마워요"(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아들이 확실하다. 어떻게 저런 아이를 내가 키웠을까. 늘 엄마로서 부족하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 19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아들은. 모든 것은 자기 할 탓인 나이다. 이렇게 나는 서서히 나의 짐을 벗어서 아들의 어깨로 옮겨주고 있다.


오늘 아침엔 태워다주는데 아들이 허준이 교수 이야기를 한다. "근거 있는 자신감"보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엄청 공감과 위로를 얻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 맞아. 근거없는 자신감이 바로 자존감 아니야??

어. 그건거지. 근거있는 자신감은 근거가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질 자신감이래. 수학문제를 잘 푼다고 해서 자신감을 가진다면, 그건 대학만 가도 무너질 거라는 거지.

어. 근데, '근거없는 자신감'은 정말 갖기가 어려운 거 같아. 어려서부터 사랑을 정말 많이 받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거같아. 엄마는 그게 없어서 진짜 너무 힘들었어. 언제나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하고, 최고로 성과를 내야 하고... 너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어?

(조마조마 듣고 있는데) 어. 있어. 있는 편이지.ㅎㅎㅎㅎ (이 말을 듣고 안도했다. 잘 컸구나.)

엄마가 처음 엄마가 됐을 때 엄마가 자존감이 없어서 형아를 너무 다그치면서 키운 거 같아. 그래서 걔가 집을 나간거 같아.

형은 사회에서 자신감을 얻게 된 거 같아. 잘 살지 않아?

어 맞아.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다양한 사람들 만나다보니,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된거지. 너무 다행이야. 걔 진짜 똑똑해. 엄마랑 계속 살았으면 더 힘들었을거야.

...

한동안 큰 아들은 나의 아픈구석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되뇌이고 되뇌었지만, 잘 몰랐다. 티비를 보며 범죄나 사고소식을 보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과 소주를 마시면 꼭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엉망진창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들은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어른들에게도 잘 하고,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친구들을 잘 보살피면서 살았고, 지금은 같이 일했던 어른들이나 점주들에게 다시 와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1학년 때 빵꾸낸 학점을 채우느라 3년제 학교를 4년 다니고 있지만, 학교 생활도 백퍼센트 즐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도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다. (담배만 좀 끊으면 좋겠구만)

어제는 밥이 떨어졌대서, 햇반이랑 참치랑 김치랑 김을 한박스씩 주문해줬다. 이번학기까지만 해 줄 생각이다. 자동차 랩핑을 배운다고 5월에는 학원비를 달라고 한다. 밥벌이 해야 하니 뭐라도 배워야지. 4년 배운 요리 실력은 언제 써먹으려나. 완전독립의 9월1일만 기다리고 있다.


아들 좋아하는 명태식혜랑 생연어랑 스테이크 주문해놓고 오라고 꼬셔봐야겠다.

이제 나의 엄마로서의 역할이 다시 변화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너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이 말을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아이가 되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중간고사 보는 시기에, 자기 아들이 동아시아사를 너무 어려워한다며 선택과목을 바꿔달라는 엄마가 있다.

안되면 장학사를 대동하고 학교로 오겠단다. 대응하는 건 하나도 일이 아닌다. 다만, 너무 안타깝다. 선배엄마로서 말해주고 싶다. 아들, 그렇게 키우시면 안되요. 그러나 나는 그의 언니가 아니니 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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