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를 아름답게 채우는 즐거움

'요리'라고 하기엔 쑥스럽지만서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일 오래된 친구가 놀러왔다. 같이 된장찌개를 끓여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친구가 옆에서 혀를 차며 순서를 알려주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요리를 먹을 줄만 알았지, 할 줄은 몰랐다. 그때도 유튜브가 있었다면 훨씬 잘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 해결을 책으로 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에 따라 요리책을 이리저리 사모으고 읽었지만, 요리는 좀처럼 하게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런 시대는 끝났다. 한살림 회원이 되고, 좀 비싸도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먹고살려고 노력했다. 새로 만들 음식 재료를 사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비법을 전수받곤 했고, 아이 밥을 먹여야 해서 이것 저것 시도해봤다. 하지만 결국 아이를 키운 건 달걀과 굴비와 김이었다.


내가 요리를 더 잘했다면 밥을 잘먹는 아들들이 되었을까? 큰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키가 작은 순으로 한두번째였고, 1학년 급식시간 내내 급식을 겨우겨우 먹고 꼴찌로 교실을 나서는 아이였다. 둘째는 아기때는 야무지게 이것저것 잘 먹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는 영 먹는 걸 안좋아해서 늘 마르고 키도 더디 컸다. 아침 먹이고 출근하려고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해두고 갔지만, 결국은 퇴근 후 그대로 뚜껑 덮여 냉장고로 직행한 음식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겨우 찾은 대안이 식빵에 쨈이었지만, 그것도 별로.


학교 마치면 돌아와 한번 앉아볼 새도 없이 아이들 먹일 밥을 만들고 먹이고 치우고나면 9시였다. 잘 먹을 무언가를 찾아 늘 고민하고 뒤지던 때였지만, 결국 아이들이 좋아한 것은 달걀, 고기, 된장국, 김치찌개 정도였던 거 같다. 먹는 양도 많지 않았다. 뭐,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도 변변찮았고, 한살림에서 간편식으로 나온 것들이나 엄마에게 의지해 연명했다. 교육청에 근무할 때는 대체 무엇을 먹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 아들들아.


호치민에 가서야 음식 만드는 즐거움을 알았다. 어딜가나 풍부하고 다양하고 싼 식재료들이 사시사철 손 닿는 곳에 있고, 국제도시 답게 각국의 요리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학교근무는 5시면 끝나니 요리해먹을 시간도 있다. 아들하고 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스테이크와 한국요리들을 고집해서 많이 만들어봤었다. 이 때 요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기본적인 양념과 식재료 다루는 법을 알게 됐다. 그 맛있는 베트남 요리들은 바깥에서 나 혼자 먹었다. 그 즐거움도 아주 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음식은 100분의 1도 되지 못한다. 퇴직하면 반드시 동남아시아에서 오래 살 거다.

사시사철,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와 가지를 헐값에 먹을 수 있었던 곳,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 등 각종 향채도 그립다. 삽으로 퍼서 싸주던 애플망고도.


50살이 넘고 '건강하게 늙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면서, 그리고 한국음식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깨닫게 되면서,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봐야 건강에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최대한 간편한 요리로 먹고 살려 노력한다. 사계절이 있는 한국은 식재료 값이 널을 뛰어, 최대한 제철에 많이 먹어야 한다.

퇴근하면 오자마자 코끼리처럼 잔뜩 먹고 바로 운동하러 간다. .알록달록한 식재료로 접시를 채우고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접시 옆에는 알콜잔이 있어야 그림이 좋은데, 작년에 술을 줄이라는(네? 제가 뭘 얼마나 마신다고요?)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술잔을 치웠다. 아쉽다.


밥을 좋아해서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요리시간은 채소만 미리 씻어놓는다면, 10분 이내에 만들 수 있다. 단백질을 충분히 먹으려고 노력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요리하는 게 좋다. 토마토와 냉털채소를 때려 넣어 밥솥에 돌리는 토마토 카레를 해두면 귀찮을 때 간단히 맛있게 먹을 수 있고, 익힌 채소를 좋아해서 토마토, 양배추나 시금치에 달걀, 치즈를 넣고 토르티야를 만들면 뭔가 레스토랑 분위기가 나서 좋다. 아. 아쉽다 와인. 제일 좋아하는 채소는 토마토, 시금치, 아스파라거스, 가지. 올리브는 병조림으로. 바질페스토 사랑한다. 두부면은 면대용이지만, 맛은 없다. 라면은 한달에 한번 정도 먹는데, 반개에 콩나물이나 숙주, 파를 듬뿍 넣으면 나름 욕구가 충족된다. 드레싱은 발사믹식초+올리브오일, 그릭요거트+스리라차 또는 홀그레인머스터드, 레몬즙+올리브오일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내 취향 식단을 아직은 우리집 남자들은 좋아하지 않아서, 상을 차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땐 주로 국하나, 두툼한 달걀말이나 고기 생선요리, 밑반찬을 한다. 아들이 아침밥을 잘 안먹었는데, 살살 꼬셔서 요즘은 아침을 꼭 먹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잠도 자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니, 아침마다 눈뜨면 아들 아침도시락 싸는 게 나의 숙제다. 교실에서 간단히 꺼내 먹을 주먹밥을 만드는데,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잘 버티는 중이다. 나름 재미도 있다. 얼마전부터 남자들의 밥도 찹쌀현미+오분도미로 바꾸었다. 다행히 잘 적응해주어서 그 밥에, 채소 조금, 고기류 조금 넣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침도시락 싸러 5시40분에 일어난다. 시간싸움이다. 사진 찍는 걸 자꾸 잊는다. 일종의 기록인데.

둘째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스테이크 오므라이스다. 위에 얹는 계란은 우유를 넣고 휘저어 약한 불에 익혀낸 폭신폭신 부드러운 계란옷이다. 밤늦게 돌아와 먹는 건 자제하려하지만, 비빔면이나 짜왕(짜파게티는 싫어한다.)에 달걀프라이를 얹어 주면 대만족이다. 나뚜르 말차 아이스크림이나 연세딸기요거트까지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아이다.


호치민에 있을 때부터 같이 중요한 축구경기를 볼 때 한국식 치킨을 시켜 먹고, 주문이 안될 때는 치킨너겟이라도 구워 먹었는데, 그게 습관이 되어 축구를 볼 때는 치킨을 시키고, 축구가 없어도 2주에 한번쯤은 치킨을 먹고 싶어한다. 그때는 비비큐 황금올리브치킨을 콤보(닭다리, 닭봉, 닭날개만 있는 메뉴, 추가요금이 4000원이다. )에 황금치즈볼 5개짜리 추가해서 시켜야 한다. 아이가 치킨을 먹는 건 배가 고프거나 먹고싶다는 것 뿐 아니라, 집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 같아서, 주문한 양을 다 못먹는 때가 많다. 그럼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하루 이틀 뒤에 남은 고기와 양파채를 넣고, 가쓰오 육수에 달걀물을 부어 밥 위에 올린 '야매 오야꼬동'을 만들어주면 또 잘 먹는다.


가끔, 혼자 살고 있는 큰아들이 오는데, 그를 위해서는 일단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연어 1킬로를 주문한다. 오리고기랑 그릭요거트도 사고, 유부초밥 재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한다. 격투기를 취미로 해오고 있는 아들은 경기 준비를 위해 체중관리를 하고 있어서, 집에 올때만이라도 먹고 싶은 걸 잔뜩 먹이고 싶다. 그래도 아이들이 크니까 고기먹을 때 채소를 먹는 것도 가능해졌다. 나이들면서 차차 알아가는 게 있나보다.

산동네에 이사오고 나서는 친구들을 불러 가끔 모임을 했다. 새로 산 원형탁자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와인과 함께 먹으며 온갖 잡다한 수다를 떠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간단한 요리들을 이리저리 만들고, 그들이 사오는 안주류들을 늘어놓으면 금새 맘에 드는 식탁이 차려지곤 했다. 우리집은 창밖 풍경이 팔할이라, 뭘 해도 다 좋아진다.


가끔은 위로를 받고 싶은 후배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냉장고를 털어 뭐든 만들어내서 같이 먹는다. 나이가 들자 위로를 받을 일은 별로 없어지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 이들은 더 많아진다. 교통이 좋지 않은 산꼭대기 집이지만, 누구나 편히 찾아올 수 있는 언니네 집이 되면 좋겠다.

술. 술을 안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중독 수준은 절대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번 맥주나 와인 한두잔을 마신 건데, 몸에 안좋다고 줄이라면 대체 뭘... 술자리에서 빨간 뚜껑 소주만 한병이상 마시던 나인데, 그걸 안하는데도 몸이 안좋아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이를 이길 수는 없나보다. 그래, 건강하게 늙자. 최대한 자제해야지. 술과 여유를 포기하고 운동과 일본어에 매진하고 있다. 약간 슬럼프 시기이긴 하지만.

그러다보니 올해들어서는 모임을 한번도 안한 거 같다. 우리집 창밖 풍경을 보며 모임 참여자들이 만들어준 플레이리스트를 우리집 사운드바로 듣는 건 너무 좋은 일인데... 요시. 6월엔 꼭 친구들을 불러 모아야지.


이렇게까지 내향적인 인간인 줄 몰랐다. 나는 그동안 사회적 가면을 잘 써온 것일까?

혼자만의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나이가 들며 여러 면에서 자신감이 없어진 것도 그 요인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행복한가? 음. 행복하다. 소소하게 늙어가고 싶다. 세상이 나를 흔들어대도, 사회적인 삶에 올인하지 않으리라. 나의 초록색 스탠드 아래서 먹고, 듣고, 읽고,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다행이다. 이런 삶을 알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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