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환에서 꽃피운 우리들의 자매애
시작은 서귀포 사는 한언니가 함께 회복적 정의 관련 책을 쓰고 있는 김을 서귀포로 불러들이면서였다. 김은 목포에서 한동안 쉬다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넘어가 한언니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김을 통해 나의 암진단 소식을 접한 언니는 나도 불러들였다.
글쓰는 둘 옆에 가봤자 방해만 될 거 같아 서귀포 바닷가에 숙소를 잡았다. 바다 가깝고 수영장 있고 저렴한 숙소를 찾다가 우연히 3만원대의 트윈룸을 잡게 되었고, 침대가 둘이니 윤에게 오라고 하니, 바로 항공권을 끊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부산에서 한언니의 친구 정언니가 제주로 오고 있었다. 이렇게 다섯명이 제주도 서귀포시에 모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역사교사였고 지난 20여년 동안 각자 자기 지역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또 모두 50대였다.
#법환 첫날
비행기를 오랜만에 타게된 6일.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가니 '낮술'이라는 낭만적 단어가 보였다. 와, 이제 낮술도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시대로구나...만 난 이제 술과는 상관없는 사람. 삼성카드에서 준 더라운지 커피쿠폰으로 앤젤리너스에서 커피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창가보다는 복도쪽을 좋아하지만, 오랜만의 비행이라 창가를 선택했다.
내 숙소는 서귀포 법환포구 근처. 수영장 때문에 예약했지만, 숙소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베란다에서 범섬이 보였고 주변은 고요한데 맛있는 음식점도, 음악까지 좋은 카페도, 걷거나 달릴 수 있는 해안길도 있었다. 세탁기와 건조대도 있고 큰 문제 없으면 에어비앤비처럼 자율적으로 지낼 수도 있었다. 주인님은 스킨스쿠버와 수중사진작가로 스쿠버강의와 실습도 지도하고 계셨다.
[카카오맵] 오션트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월드컵로 188 (강정동)
https://kko.kakao.com/dNpIBn5SiS
저녁에 나를 찾아온 세 명의 여성들. 이 조합, 특이하다. 그러나 너무 반갑고 정답다. 네 명이 모였는데, 세 명이 암환자에, 곧 수술을 한 후에 암 조직검사를 한다는 나머지 한명까지. 방학마다 온 힘을 다해 즐겼던 자주연수에서의 강한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이제 서로를 애처로워하며 힘이 되어주려는 중년 여성들의 자매애가 물씬 느껴져서 좋았다.
한언니의 특별 대접코스인 현지인들의 맛집 '동환식당'에서 자리물회와 생선조림을 먹고 그 옆 카페 '다린'에서 빙수와 쌍화차, 대추차를 먹으며 쉴 새 없는 수다꽃을 피웠다.
#법환 이튿날
윤이 오기로 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더워지기 전에 해안을 걸었다. 왕복 3킬로 정도 걷고 숙소에 돌아와 씻고 잠시 쉬었고, 이것저것 보다가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즐거운 고민. 하지만 내 자리에 발령받은 새 교감과 통화를 하다가 시간을 놓쳐버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무작정 나서서 길 건너 '외가집'에 들어가 주문했다. 불맛 나는 간장돼지고기볶음에 생선(이름 모르겠다) 튀김, 정갈한 반찬에 맛있는 보리차까지 완벽한 식사였다.
라디오에서 루시드폴의 고등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그 가사가 마음을 흔들어, 방에 돌아와 여러번 들었다.
https://youtu.be/-pZJsGIlu_o?si=ud5m_g4Iak9sBfIs
숙소 바로 옆 카페 러디스는 시그니처인 우도땅콩크림라떼가 맛있고 정원이 예쁘고 바다 풍광을 품은 멋진 곳이어서, 오후에 오랜만에 전화한 대전 사는 대학동기랑 긴 전화통화를 한 후 앉아 우치다 다쓰루의 책을 읽었다. 카페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계속 있다가 김과 정언니와 함께 정원카페 '베케' 란 곳의 정원 도슨트 해설을 예약해둔 걸 기억해내고 버스를 타고 갔다. 렌트하지 않는 제주 여행이 진짜 얼마만인지.
베케 입장료는 네이버에서 예약하면 할인되어 1만원씩이었지만, 그 돈을 주고 올만하지 않다... 싶었다. 차라리 곶자왈 숲 해설이 더 좋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덮어둘만큼 멋진 곳이 있었으니, 새 건물 짓기 전 카페로 썼다는 현재의 베케 뮤지엄이었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 내다보는 창밖 풍경 덕에 모든 게 용서됐다.
관람을 마치고 셋은 다시 법환으로 돌아왔다. 법환초등학교 앞 소품샵 '소울'엔 제주관광상품이 아닌 다양한 옷과 소품들을 설레면서 구경할 수 있었고, 숙소 바로 옆 우럭튀김정식 식당에서 다시 모인 4명의 50대 여성들은 수다꽃을 피우며 맛있게 우럭 한마리씩을 싹 발라먹었다.
밥을 먹고 숙소에 짐을 둔 후 운동담당 김에게 웜업부터 러닝, 쿨다운까지 슬로우러닝 훈련을 받았다. 호치민에서의 막무가내 러닝으로 얻은 무릎통증과, 작년 하반기 내내 고생하다 필라테스 맞춤수업을 2달 정도 받은 후 완치된 족저근막염 때문에 두려워하던 러닝이었으나 김의 특화된 훈련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성공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기분좋게 쿨다운하고 나의 이틀째 법환을 마무리 했다.
#법환 사흗날
다음날은 색달해변에서 함께 튜브 타기를 전날 헤어질 때 결의했으므로, 수제요거트에 바나나와 견과를 얹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색달해변 입구 더클리프에서 점심을 먹으러 네 여성이 모였다. 제주로 우릴 불러들인 한언니는 전주 출장에서 밤에나 돌아오는 날.
더클리프의 시그니처인 현무암 치킨이 참 맛있었다. 해도 없는 날이었는데도 해 넘어가면 파도 타야 한다며 실내와 실외 좌석을 옮겨다니며 끊임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누가 보면 세상없이 오래된 친구들인 줄.
"벤츠 탈 나이에 튜브 타러 온 우리"들은, 튜브 하나씩에 매달려 신나게 파도를 탔다. 더 멀리 바다는 서퍼들의 차지여서 가두리양식장처럼 바글바글 좁은 구역에서 타긴 했지만 색달의 파도는 참 좋았다. 애들 크고 나서는 좀처럼 이럴 일이 없었어서, 너무 신나 흥을 끌어올린 나는 큰 파도에 뒤집혀 머리를 모래바닥에 꼬라박아 목부상을 당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거의 다 회복되었다.
저녁은 주인없는 서귀포 혁신도시 한언니네서 냉장고를 뒤져 한상 차려 거하게 먹었다. 한언니가 들이닥치면 어디에 숨나 하며 영화 기생충을 언급하며 함께 깔깔댔다. 나랑 윤은 법환으로 돌아왔다. 설거지와 뒷정리는 김과 정언니가 쥐도새도 모르게 했을 건데, 내가 팔에 끼고 있던 아대를 떨어뜨리고 와서 집주인님께 기생충의 존재를 들킬 뻔한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사흘째 법환이 끝났다.
#법환 나흗날
찜해둔 '카페 텐저린'에서 콥샐러드와 따끈한 당근수프로 아침식사를 하고, 긴 산책을 마치고 숙소에 들렀다가 밥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영은 맛집'에 가서 고기국수를 먹었다. 깔끔한 맛이어서 좋았다. 가족들 선물 사러 매일 올레시장에 갔다. 마침 농산물을 사면 1만원을 시장상품권으로 환급해주는 행사가 있어 집에 귤을 보냈다. 윤은 엄마 좋아하시는 젤리를 사고 나는 육포랑 문딱라면 한봉지를 상품권으로 샀다.
떡집 똘래미에서 주인님이 직접 만들고 계신 곁에서 귤떡을 사먹고, 집필 마치고 온다는 김 것도 하나 사고 사색만두도 한상자 사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간 정언니는 공항 가기 전 강정에 잠깐 갔다가 우리 숙소 옆 러디스에 와서 나흘째 법환을 채우고 돌아갔다고 한다.
너무 많이 먹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역시 운동담당 김이 러닝훈련을 시켜주어서 안심했다. 너무 습해서 숨쉬기가 좀 힘들고 땀이 너무 많이 났지만 그래도 좀 뛰어서 다행이다. 김을 데리러 온 김의 바깥 양반 한언니와 산책하고 김을 딸려 보냈다. 배부른 나흘째 법환이 막을 내렸다.
#법환 닷샛날
이번 여행의 식사는 거를 곳이 하나도 없다. 좋은 재료, 정갈하고 맛있는 요리, 제주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이다. 김과 윤과 나 셋이서 여행지에서 만난 것은 22년쯤 충남 자주연수 이후 처음. 그새 셋 중 암환자가 둘이 되었다. 나머지 하나 윤을 운동시키는 게 우리 둘의 사명. 하지만 맛있는 거 좋아하는 윤을 위해 동환식당-다린 코스를 다시 가고 방에 들어와 쉬다가 일하다가 저녁으로는 법환포구식당에서 물회까지 먹었다. 다행히 식당과 숙소는 1.5킬로 가량 떨어져있어 먹고는 꼭 걷기. 아. 아침수영도 한시간쯤 했다.
법환에 머무는 내내 비가 흩뿌리고 흐리고 습했는데, 처음으로 습기가 좀 걷히자 범섬이 뚜렷하게 보였다. 노을까지 보여주는 하늘 아래를 걸어 천천히 돌아왔다. 김은 바깥양반 한언니가 데리러 와서 딸려보내고, 나의 닷새째 법환이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아쉬워 비행기를 변경하고 종달리에 방을 잡았다. 2박3일만 더 호젓하게 보내다 가야겠다.
#법환 엿샛날
닷새 동안 매일 만난 법환의 자매들. 건강한 식사와 걷기, 달리기, 그리고 암조차도 일상인 언니들과 친구들 덕에 일상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또 오게 될 거다. 법환. 그땐 오션트리에 머물며 동환식당-다린 코스를 거쳐, 3킬로를 쉬지 않고 달리고, 바로 여탕 용천수에서 수영을 해야겠다.
아마 정언니의 부산에 먼저 가게되겠지? 부산 파도 맛을 먼저 봐야겠다.
*** 호우주의보가 떴다. 계획했던 아침수영은 취소. 짐싸고 나갈 준비. 비가 그쳐야할텐데.
이래야 제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