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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큰아들 오는 날

잘 자라줘서 고마워!

제주에서 돌아오니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 주말 맞이 고기 살 때가 되어 몇 종류 주문했다. 우리집에서 주로 사는 건 저렴한 수입산 (호주와 미국산) 소고기, 살치살이나 스테이크용. 주로 아들을 위한 식재료다. 주말에 한번 요리해서 먹이고, 남은 것은 한회분 정도로 나누어 냉동한다.


이번엔 좀 다른 걸 먹여볼까 하다가 샤브샤브용과 구이용 소고기와 잡채용 돼지고기를 샀다. 샤브용은 고기전(육전)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한 특별식으로, 구이용은 조금 덜어 나의 단백질 보충용으로, 돼지고기는 몇달전부터 별러온 잡채용이었다. 육전은 아이들이 어릴 때 명절에 한번 해줬는데 너무 잘 먹어서, 번잡스러운 과정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도하는 요리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육전이라면 못알아들어서 고기전이러 부른 것이 우리집에서 상용어가 됐다.


수개월 전 중국쪽에 다녀온 누군가가 질좋은 건조 목이버섯을 주어서 잡채나 할까 하고 한살림 당면을 사두었는데, 그로부터 또 수개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진짜 한번 해볼 생각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모든 채소가 딱 3종류라니.

토요일 아점을 준비하려는데 딱히 뭐 떠오르는 게 없어서 냉동실을 열어보니 황태채가, 냉장실에는 벌써 2달쯤 전 도착한 무가 포장도 벗기지 않은 채 들어 있었다. 세상 쉬운 황태무국을 진짜 몇달만에 끓였다. 3쿼터에 들어서서야 역전을 노리는(아들이 스스로를 수식하는 구절) 둘째는 요즘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없다. 아침마저 소화가 어렵다며 도시락도 안가져가고 있다. 그래서 마련한 주말특식이 고기전. 부침 중 가장 쉽지만, 우리 아들들은 제일 좋아하는 전이다. 한상 차려 뚝딱 먹이고 황금향 두개 잘라줘서 먹이고 또 공부하러 나갔다.

토마토바질 냉파스타. 고기전에 넘어온 큰아들.

동생이 언니들 밥사준다고 나오래서 남대문 로컬스티치에 갔다. 세 자매 다 결혼하고 애 키우느라 따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거의 15년쯤 된 거 같다. 우리끼리만 시내에서 만난 게.

로컬 스티지의 다른 가게인 '칠리'에 갔는데, 예상대로 훌륭했다. 차분한 가게도 좋았다. 토마토바질 냉파스타는 진짜 너무 맛났다.

[카카오맵] 칠리 남대문점
서울 중구 퇴계로2길 9 2층 (남창동)
https://kko.kakao.com/o7wW4a8HWr


수다를 떠는 도중 큰아들이 온다는 톡. 음. 얼른 아들이 좋아하는 식재료들을 다시 주문했다. 생연어는 주문하기에 늦어 훈제연어(냉동)를 주문했고, 스테이크 고기 좋은 놈으로 샀다.

단지 내 카페에 갔는데 토요일답게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중년여성들에게 힘들었다. 그냥 우리집으로 들어와 7시까지 온갖 이야기를 다 하다가 돌아갔다.

... 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큰 것 같아.가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다들 지금도 남모를 갈등을 껴안고 사는 거 같다. 그 시절 부모님의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도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품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지 않았어도 좋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우리 아들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을까.

아침에 둘째의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물어봤다. 너는 엄마가 너를 많이 사랑한 거 같아? 그랬더니 고민도 없이. 어. 그럼. 이라고 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나의 힘듦과 어려움과 갈등을 너희에게까지 전가하지는 않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일요일,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난 아침. 잡채는 볶는 게 귀찮고 건강에도 안좋으니 찜통에 한꺼번에 쪘다. 냉장고에 변변한 채소가 없어 당근 양파 목이버섯 세가지만. 돼지고기는 간장 마늘 설탕 조금 넣어 재웠다. 아 귀찮은 당면삶기. 피해보려고 야채랑 같이 찜통에 찌다가 지들끼리 쩍쩍 붙길래 폭삭 망할까 겁이나서 얼른 꺼내 찬물에 헹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면을 찬물에 헹구면 지나치게 탱탱해지는 반갑지 않은 결과가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고.. 그래도 물끓여 삶기는 너무 귀찮아서 포트에 물을 끓여 붓고 익을 때까지 뒀다. 양념해서 재워둔 돼지고기는 볶는다.

당면을 먼저 보울에 담고 진간장과 약간의 설탕으로 미리 간했다. 오늘 너무 설탕을 많이 쓰지만. 당면이 불면서 싱거워지기 때문에 간을 좀 세게 해도 나중엔 괜찮아진다. 여기에 야채를 때려 넣고 비비다가 참기름과 깨를 뿌리고 간을 맞추고, 볶은 돼지고기를 넣어 또 섞는다. 야채가 다양하게 더 많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이쯤에서 만족.

오랜만에 달리고 온 둘째 아들이 맛있다며 신나게 먹었다. 나도 오랜만의 잡채라 많이 먹었다만 먹는 내내 아침에 찾아본 당면의 GI지수(높은 쪽인 100정도)가 생각나 맘이 편치 않다. 광복절날 산동네에서도 달릴 수 있나 보려고 굳이 북악산 둘레길을 뛰고, 다음날 또 실내자전거를 욕심냈더니 무릎이 살짝 아파서 오늘 운동도 쉴건데.. 자제해야지 ㅜㅜ

여름배추로 만든 김치는 진짜 맛이 없다. 종가집에서 갈아탄 김치에 만족했는데, 여름김치는 역시나 별로였다. 아들 먹으라고 김치를 들기름에 볶다가 물을 조금 넣고 다시토큰을 한알 넣어 졸였더니 꽤 맛있었다.


자. 이제 스테이크만 시즈닝해서 넣어두면 되는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지만 한해한해 성숙해져서 이제는 내 마음을 위로해주기까지 하는 든든한 우리 큰아들이 온다니 기꺼이 준비해야지.

오늘은 큰아들이랑 수다 좀 신나게 떨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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