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막국수와 깻잎비빔국수를 먹는 막내라니
고3 아들의 주말은 늘 늦잠으로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이 늦잠이라는 단어와 호응하지 읺는 거 같긴 하다만, 표현의 묘미를 살리는 의미에서 이리 적어본다.
아들을 일찍 깨워보려 지난2년간 애썼지만 서로 힘들기만 하고 성과는 없이 기분만 상해서 나도 느지막히 일어나는 걸 택했다. 그래봤자 8시지만.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일요일에도 6시면 어김없이 우리를 깨웠다. 정말 지긋지긋했었는데, 언제든 해가 뜨면 일어나는 좋은 습관을 가진 게 그 덕분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게 호르몬 생성의 리듬을 망가뜨리지 않아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낮 2시는 되야 일어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가 주말에 일찍 깨우는 일은 이제 불가능한 시대라고 본다.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침식사 준비. 오래전에 구입해서 냉동해둔 슬라이스 햄을 꺼내 해동하고 물에 데친 후, 양상추와 토마토를 끼워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전날 중국에서 잠시 들어온 베이징한국국제학교에 근무하시는 샘과 북촌에서 만났는데, 안국153을 들러 잡곡식빵을 하나씩 사서 들려보내며 내 것도 구입.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잡곡빵이나 호밀빵, 사우어도우, 깜파뉴 같은 건 가끔 너무 먹고 싶다. 153에 오랜만에 갔으니 나를 용서하자.
샌드위치를 종이호일로 싸는 일이 영 어려웠는데, 이번엔 유튜브를 찾아 터득하고야 말았다. 아들 것은 준비완료했으니, 나는 전날 만든 야채 반찬들을 꺼내 잡곡밥을 아주 맛나게 먹었다. 이런 밥상이 제일 좋다. 점심엔 엄마가 밥 사준대서 나갔는데 뭔가 화려하고 다양했지만 시고달고짠 소스들이 내 입에 너무 강해서 돌솥밥에 물부어 만든 누룽지만 맛있게 먹었다.
월요일부터 4박5일간 아들은 동아시아청소년캠프에 간다. 한중일 청소년들이 만나는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란 단체의 전통있는 행사. 코로나 이후 작년에 처음 열려 올해로 두번째 참가다. 입시가 100일도 안남은 녀석이지만,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취업하기로 했으니 앞으로의 삶에 고민과 지침을 만들어보길 바라는 맘에서 기꺼이 보냈다.
뭐든 급한 게 없어 언제나 내 속을 터지게 만드는 아들은 캠프 준비도 역시 그랬다. 부랴부랴 일요일에 다산 프미아까지 가서 운동화 사고 약과 사야한대서 다산 이마트 가고, 렌즈사러 안경점가고. 그 와중에 저녁때가 되어 프미아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는데, 회막국수를 시켜 먹는 아들. 동성고 다니면서 혜화동 맛집들을 다니더니 맵찔이가 회국수를 다 먹는다 싶었다. 국수는 고기먹을 때 먹는 냉면 말고는 먹기 싫어해서 다른 식구 다 국수 먹을 때도 따로 밥을 챙겨줘야 했는데.
오늘 캠프 가기 전에 점심을 뭘 먹이나 하다가 내가 먹으려고 사둔 한살림 현미국수를 들기름 막국수 식으로 비벼먹기로 했다. 현미국수는 쫄깃하고 탱탱해서 소면과는 완전 느낌이 달랐지만 양념을 비비니 맛이 좋았다. 남아있던 깻잎과 오이를 가늘게 채쳐 넣고 간장4, 식초1, 알룰로스1/2, 들기름4, 청양고추1로 장을 만들어 비벼먹었다. 먹기 싫어할까봐 시즈닝 해서 얼려두었던 스테이크 고기도 잘라서 구워주었다. 달걀도 2개나.
... 세상에, 연신 맛있다며 잘 먹는다. 깻잎이랑 오이 넣었는데... 괜찮은 거지??
아이가 자란다는 건 점점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것도 포함된다. 젖을 먹이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20년 전. 이유식도 제대로 만들줄 몰라 맛없다고 다 뱉어내면 그냥 끓인 밥에 어른 반찬을 잘게 잘라 먹이곤 했는데. 여행다닐 때도 안먹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김은 필수로 지참했고, 식당에서 주방 아주머니께 부탁해 달걀 프라이 하나 얻어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내 밥보다 아이 밥 먹이는 게 우선이었던 긴 세월이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날 김치를 먹고, 상추를 먹고, 현미밥을 먹고, 이제는 집에서 만든 국수도 먹고.
다 키웠네. 어디가도 먹고는 살겠구나.
언제 한번 만들어보나 싶던 당근라페에 드디어 도전. 강판에 밀어 썰고, 소금에 20분 절여 짜고(소금을 더 적게 넣을 걸), 올리브오일과 후추를 넣어 비볐다. 저녁엔 달걀이랑 두부 넣고 김밥(밥은 빼고) 한 줄 말아먹어야겠다. 22년에 귀국할 때 욕심껏 사온 베트남 후추를 여전히 잘 먹고 있다. 베트남 중부지역 답사할 때 후추나무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아. 후추가 저렇게 자라는구나. 베트남 후추 정말 맛있다. 말리지 않은 초록후추도 구워 고기에 곁들이면 풍미가 아주 좋다.
아. 아들 준다고 구운 스테이크를 여러조각 내가 먹어버렸다. 으아. 오늘 운동은 더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