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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이라는 피치 못할 선택

다양한 장아찌 세계의 공통언어

날이 너무 덥다. 올해가 내 인생의 가장 시원한 여름일거라는 예감이 든다. 기후위기를 공부할 때 겪었던 기후우울증이 스멀스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이러면 안되지. 뭔가 상큼한 게 필요하다.

벌써 한주의 마지막, 금요일이다. 지난 한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이번주 목요일부터 필테수업이 휴가라서 바쁜 월요일 제외하고 화, 수 연달아 필라테스에 갔다.

에어컨은 교통수단과 공공기관에서 즐기고 집에서는 선풍기를 틀어두는데, 갱년기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그렇게 싫어하던 에어컨과 선풍기 바람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헌데 슬슬 목이 아파오고 몸이 뻐근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필라테스 선생님이 요즘 강도를 높인 것도 있지만, 50분 운동하고 나면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다. 수요일 체어수업을 마치고 나니 도저히 집에 갈 힘이 없어서 좋아하는 카페 덤다이브에 갔다.

토마토 바질 에이드로 충전하고 집으로 가는 길, 오랜만에 노을이 예쁘다

요즘 말차 붐을 타고 어느 카페에서나 말차라떼를 판매해서 좋다. 녹차라떼는 많아도 내가 좋아하는 말차라떼는 없더니만. 그러나, 역시, 달다. 말차라떼는 달게 만드는 건 왜일까. 그 씁쓸한 맛을 즐기는 게 말차의 묘미건만. 주문하기 전에 달아요?를 물어보게 된다. 주문하면 바로 만들어주는 카페는 시럽을 빼주는데(스벅은 가능) 대부분의 카페는 베이스를 만들어두고 우유만 타주다보니 빼기 쉽지 않다. 덤다이브도 달다고 하길래, 뭘 마실까 저녁에 커피는 안되고..하다가 새롭게 판매한다는 토마토바질에이드를 시켜보았다. 덜 달다길래.

내가 좋아하는 바질과 토마토를 모두 넣었으니 얼마나 맛있겠어. 역시 맛 뿐 아니라 그 모습이 너무 청량했다.뭐 역시 단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게 설탕에 재운 토마토와 바질에 탄산수를 타주는 거였다. 그래도 맛있긴 했다. 설탕을 줄여서 만드는 방법이 없을까? 한번 시도해봐야겠다..(만, 과일청을 설탕 말고 뭘로 만들 수 있을까?)

정말 우연히 발견한 '어쩌다 농부'와 로컬스티치 회현 마을

월요일엔 남산 쪽에 일때문에 갔다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섯명이나 만났다.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암진단 받고 더욱 건강한 제대로 음식만 찾는 나는, 회현(남대문시장)이라는 분위기 불모지에서 어디를 가야할지 약속장소 컨텍에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어쩌다 농부'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내가 집에서 만드는 건강식의 고급스런 버전임을 알고 바로 예약했는데, 정말 120%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음식도 훌륭했지만, 도시재생을 통해 '로컬스티치'라는 공유가게와 사무실, 공유거주공간을 운영하는 사업의 하나였다. 낡은 건물 몇개를 하나의 마을로 묶어 식당, 꽃집, 디자인조명 쇼룸, 소품샵, 카페 등을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서울 곳곳에 같은 컨셉의 단지가 있는 거 같았다. 이름도 너무 이쁘다. 어쩌다농부=OOPSFarmer. 명동엔 샵도 있다는데, 꼭 가봐야겠다. 다섯명이 앉아서 신나게 주문했는데, 의외로 양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나물파스타의 향이 아직도 생각난다.

우리 고3 아들은 여유를 만끽하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다. (아들아, 니가 그럴 때가 아닐텐데?)

첫 며칠은 싸우고 혼냈는데, 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 않나? 내려놨다. 니 뜻대로 살아야 니 갈 길을 찾겠지. 밥이나 챙겨 먹이자.로 방향 선회. 한살림에서 주문한 호박잎이 왔길래 쪄서 아침부터 호박잎, 양배추, 깻잎쌈에 두부, 소고기(아들꺼), 오리고기(내꺼) 를 먹었다. 한동안 고기를 안먹어서 오리고기를 먹는 게 내 뜻이었으나, 역시 오리고기는 나에게 안맞는다. 찐두부가 오히려 맛있었다. 나의 특제 쌈장이 맛있었다. 된장, 고추장, 미소된장, 마늘 + 아몬드버터 잔뜩 으로 만들어서 짜거나 달지 않아서 좋다.

월요일은 남산, 화요일은 북촌, 수요일은 성북동을 다니다가 목요일인 어제는 집콕하기로 결심했다. 집에 있으면 맛있는 걸 내 맘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역시 집안일을 안할 수는 없다. 청소, 세탁, 음식만들기의 시간. 물론 책도 읽고 일본어 공부도 하고.

점심은 한동안 두고 먹던 채소들이 그 끝을 향해 가는 것이 보여, 그것들을 요리해 먹는 게 목표. 가지는 그래도 선방했다. 가지를 하나하나 키친타올로 감싸 다섯개씩 지퍼백에 넣어두었더니 한달이 지났는데도 별 이상이 없다. ...고 생각했ㅇ나, 갈라보니 갈색 씨가 눈에 띄기 시작할 타임이었다. 아스파라거스는 여전히 싱싱했지만 끝이 약간 물러가기 시작. 깐 마늘 보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이번엔 통마늘을 조금 사봤다. 먹을 때마다 까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새로 구입한 맛없는 두부면(적응 안되는 맛)도 뜯었다. 뭐 요리랄 게 있나, 칼질하고 올리브유에 볶아서 소금 후추 뿌리고, 구입한지 꽤 되었는데 아직 멀쩡한(그래서 의심스러운) 바질페스토와 후배선생님이 미국에서 사다준 알리오올리오 향료를 조금 넣었더니 맛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식비 아낀다고 집에서 스파게티를 많이 해먹는다고 한다. 이게 이렇게 간단한 요리인줄 몰랐다고. 시판 소스만 있으면 다할 수 있다고. 우리학교 젊은이들도 그 이야기를 하길래, 올리브유에 마늘을 살짝 볶다가 요리를 시작하라, 제철 채소 하나를 썰어 그냥 막 섞어라. 그 다음 소스를 부어라. 라고 말해줬다. 그것만 해도 몸에 좋고 풍미있는 파스타 요리 가능. 인제 와인이나 맥주 대신 보리차. 차가운 보리차가 얼마나 맛있냔 말이지.

그러나 두부면은 역시 별로였다. 그냥 앞으로는 파스타 면으로 만들어야지. 탄수화물도 먹어야 하니까.

장아찌를 담근다고 사두었던 오이가 그렇게 열심히 먹었는데도 맛이 써지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야..

채소를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사다보니 상해지기 시작하는 시점도 같구나. 오이는 이미 장아찌로 한통을 만들었는데, 이걸 다 먹을수도 없고.. 어쩌나 하다가, 일본식 츠케모노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교토에 갔을 때 츠케모노 15가지에 밥이 나오는 메뉴를 먹은 적이 있는데, 정말 감동이었다. 혹~시나 나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봤더니, 츠케모노 만드는 것도 방법이 다양했다. 그 중에 설탕을 적게 넣고 간이 심심할 거 같은 것으로 시도.

물 800밀리리터에 가쓰오브시와 다시마(다행히 둘 다 있었다)를 넣어 끓이고(여기에 동전으로 생긴 연두 국물내기를 하나 넣었다) 간장(쯔유로 했다) 3스푼, 설탕 3스푼(뭘로 넣을까 하다가 얼마전 새로 구입한 마스코바도 설탕을 넣었다), 식초 2스푼을 넣었다. 베이스를 다시물로 한다는 게 제일 맘에 들었다. 식초, 설탕, 간장을 몇컵씩 들이붓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맛도 그만큼 심심하겠지. 끓인 베이스를 살짝 절여 짠 가지, 작게 썬 오이, 4등분한 아스파라거스에 들이부었다.


내가 하는 건 요리 축에도 못들겠지만, 음식을 만들다가 자주 멈칫할 때가 바로 설탕을 넣을 때다. 설탕 또는 대체감미료를 넣어야 하는 음식레시피는 거른다. 당뇨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단맛을 싫어해서다. 단맛에 길들여지는 것은 곧 즉석식품 냉동식품에 길들여진다는 거고, 음식 아닌 음식에 홀릭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거다. 아무리 제로를 내세워본들, 단맛 자체의 위험성을 잊으면 안된다.

하지만 우리집에 늘 상비되어 있던 것이 '가는 정백당' 즉 백설탕이었다. 단 걸 좋아한 우리 아빠는 토마토에도 수박에도 설탕을 뿌려 드셨다. 옛날 과일은 요즘처럼 달지 않아서, 그렇게 먹어야 달았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는 먹지 않지만, 과육 세포 자체에 설탕을 내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즘 과일은 달다. 반면 신맛은 사라져서 사과맛이 옛날 사과맛이 아니다. 새콤달콤. 이게 없다. 아. 나도 나이 들었구나.

사실, 우리 할머니 우리 엄마의 손맛은 알고보면 정백당, 미원, 다시다의 맛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국의 맛집들도 비법을 내세우고 공개하지 않지만, 마법의 하얀가루를 들이붓고 있다에 나의 확신을 건다. 워낙 조미료랑 단맛을 안좋아해서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세 가지 마법, 이제 암까지 걸렸으니, 되도록이면 걸러야지.


실내자전거 타는 동안 식힌 후 김치냉장고로 직행. 아들 데리러 가기 전에 몇개 맛보니, 예상대로 심심한 맛, 새하얀 일본식 밥, 고항ご飯에 얹어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학교 후미진 내 자리 창가에 있던 난화분을 데려와 우리집 창가에 두었더니, 꽃이 피었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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