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선물은 노트르담 드 파리

20년만에 다시 만나다

9월이 된 후에도 잘 챙겨먹고, 잘 운동하고, 잘 돌아다니는 일상을 이어갔다. 누가 봐도 환자라든가 병휴직자로 보이지 않았을 테다. 삶에서 '일'이 빠지자 먹고 운동하고 외출하는 루틴을 지키기가 훨씬 쉬워졌고, 살도 절로 3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스트레스 지수는 늘 '낮음'이어서, 저녁 식사를 과일과 견과류 넣은 요거트 한사발로 먹으면 잠들 때까지 먹고 싶은 욕구가 없다. 일할 때는 저녁식사 때 왜 그렇게 먹고 싶은지. 정신건강을 위해 몸건강을 포기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런데, 입원을 한 주 앞두고 달라졌다. 둘째 아들 입시서류 만드느라 지난주부터 일본어 공부를 멈췄다. 병가 이후 내 아침 첫 일정이었던 일본어 공부를 하지 않자 게을러졌다. 밤잠은 여전히 못 자는데, 아침에 아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다시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자기도 하고, 빈둥대기도 했다. (좋긴 했지만, 이런 건 맞지 않는 거 같다.) 점심 먹고 나서도 영 기력을 못차리고 잠시 외출했다가는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눕거나 티비 앞에 누워 잠이 들었다. 운동도 만사 귀찮아서 실내자전거는 구석에 밀어둔 채 그대로 두었고, 입원 전날까지 하겠다던 필라테스는 예약했다가 모두 취소했다. 7월 초부터 병가로 쉬기 시작했으니 3개월 만에 일상이 늘어졌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아져서, 그리고 조금 관대해져도 되겠지 싶어서, 하루는 빵을 먹고, 하루는 치킨을 먹고, 아들 먹이겠다고 사둔 고기곰국에 흰쌀밥까지 말아먹어버렸다. 라면까지는 안될 거 같아서 아직 참고 있는 중이다. 입원 D-2인 내일은 아들이랑 수제 버거를 먹기로 했다.

으아... 요요로 더 찔 거 같아서 걱정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중이다. 수술 후엔 또 건강하고 절제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깨달은 건데, 먹어봐야 뭐 그리 맛이 있거나 특별하지도 않은 거 같다.


모르긴 해도, 입원과 수술을 앞두고 있는 것이 나름 스트레스로 작용하나보다.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9월부터 성북문화원 어반스케치반에 들어갔다. 60~70대인 수강생들과 강사님들은 나를 막내라고 배려해주신다.

20만원어치 미술도구들을 사며 시작한 어반스케치는 쉽지 않다. 첫 작품을 완성했지만 전혀 맘에 들지 않고, 열심히 스케치해간 숙제는 비례가 맞지 않는다며 수정을 명받았다. 세상에 제일 쉬운 게 공부라더니, 많은 시간 연습과 수정에 투자해야 하는 그림과 악기는 영 어렵다. '미숙한 나'를 참지 못하는 내 성정 탓도 있다. 그래도 휴직 기간 동안은 열심히 탈락하지 않고 해볼 생각이다.


주말엔 달리기 대신 날씨가 너무 좋아 북악산에 올랐다. 성급한 단풍잎들이 벌써 보인다.

이 시절 바람은 정말 천국처럼 달큰하다. 집에서 북악산 팔각정까지 가는 50분 정도 산책길은 주말 운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2주째 주말 날씨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집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꼭대기 우리집도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 곧 푸른 나무들이 색색이 물들거다. 거실에서 덮을 예쁜 담요를 하나 샀다. 올해 겨울은 거실에서 많이 지내야지

월요일엔 얼마전 대장 수술을 받은 정언니가 한달만에 체력을 회복하고, 병가의 여유로움을 즐기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길래,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가 서울 북촌과 종묘 담벼락 주변을 걸어다녔다. 입원 앞두고 심난할 거 같다면서 영양 가득 전복솥밥을 사주셨고, 익선동 로스터리 카페 1968 3층에서 종묘 숲을 바라보며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년 정도를 자주연수나 연수에서 얼굴만 보고 인사만 나누던 사이인데, 지난 여름 법환의 추억을 공유한 자매로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걱정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한가롭고 포근한 시간이었다.

종묘 숲이 내다보이는 익선동 카페, 오랜만에 들른 성북동 빵집 카페. 이날은 용감하게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입원과 수술을 앞둔 9월에는 매주 나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첫주는 경복궁 야간개장에 가는 것이었는데, 표를 예매해두고도 당일 컨디션 저하로 스킵. 둘째주에는 이상원미술관 뮤지엄스테이를 1박2일 동안 호젓하게 즐기고 왔다. 셋째주에는 뜻하지 않았던 건데,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폰 필름이나 갈까 하고 유플러스 대리점에 갔다가, 팔랑귀 효과로 폰을 바꿨다. 온갖 혜택을 다 준다며 폰을 반납하고 새 폰을 받고, 기기값을 할인해주고, 요금제 덕분에 갤럭시워치8과 갤럭시탭9도 받아왔다. 나도 안다. 이 모든 건 다 말장난일 뿐이라는 걸. 어차피 나갈 돈은 나갈 것이라는 점을. 그러나 슬슬 워치의 세계에 들어갈 때가 되기도 했고, 큰아들이 공부를 시작하면 이래저래 태블릿이 있어야 할 거라는 자기 합리화로 인해 소유물이 많아져 버렸다.

워치를 2주 착용해본 결과, 만족스럽다. 폰을 덜보게 되었고, 건강 지수들을 더 잘 기록하게 되었다. (나도 안다. 결국은 똑같이 스마트연한 것들에 노예가 되어가는 것임을)

아들 원서 준비로 맘이 바빠서 다른 것에 맘주기가 어렵다. 입원가방도 싸야 하는데, 영 마음이 안간다.

드디어 입원을 한 주 앞둔 넷째주. 하필이면 둘째 아들 원서준비 시기와 맞물려 엄마 노릇하느라고 조금 피곤하다. 지난주까지 바짝 달렸는데, 이번주(9월 4주)는 입원과 수술 전 증후군으로 영 몸이 맘대로 안움직인다. 브런치 글쓰기도 거의 한달을 쉬었다. 입원 가방도 싸야 하는데, 실내화 하나 사놓고는 스탑이다. 그래도 엄마는 보고 와야할 거 같아서 엄마한테 다녀왔다.


드디어 목요일이다. 한달 전에 마련한 아픈 나를 위한 큰 선물,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일.

건고추 아닌 싱싱한 베트남고추를 넣어주어 호치민 쌀국수 본연의 맛을 내는 곳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안국동 나향 인 안국. 국물이 하노이식인 것은 좀 부조화스러움

집을 나서기 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자다가 깼다가 늘어져 있었다. 오늘은 이브닝 라이프가 메인이라서 그렇고, 딱히 뭘 하고 싶지가 않아서이기도 하다. 정말 오랜만에 광화문에 갔다. 한때 나의 직장 동네였던 광화문인데, 그렇게 자주 시위 집회를 하러 갔던 광화문인데, 이렇게 낯설 일인가. 광화문의 밤은 이전보다 훨씬 사람이 많고, 빛이 많아져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 대형 스크린에서는 영화음악을 편곡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나오고, 그 앞에 편안한 의자에 많은 시민들이 앉아 음악과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우와. 태평성대로구나. (뭐, 주말에는 목사의 극우집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KT 건물에는 충격적으로 큰 전광판 광고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빛이 온 광화문을 물들였다. 이건 아니다 싶다. KT는 제대로 하는 일은 없이 광고수익만 얻고 있구나.

오늘 나의 목적지는 세종문화회관. 오리지널 뮤지컬들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다시 내한한 프랑스 오리지널 팀의 공연을 보러온 거다. 거금을 주고 수술 전 나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려는 목적이었다. 2005년에 보러 왔었으니까 딱 20년만이다. 그때는 육아와 학교생활에 지친 나를 위로하려는 지출이었다.

아, 저 푸른색!

큰 아들을 낳고 키우던 2000년대 초부터 한국에 뮤지컬 열풍이 일어났다. 아직 한국 자체의 공연은 별로 없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의 오리지널 팀들이 내한해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이 뮤지컬을 한다는 건 별로 상상도 안하던 시절이었다. 2001년 영국에 가서 보았던 <오페라의 유령>에 홀딱 빠져서 이후 내내 뮤지컬 넘버들을 모은 음반만 사서 들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음악들을 아주 좋아해서 CD도 많이 샀다.

노트르담 드 파리, 레미제라블, 캣츠도 내한공연을 보았고, 미스 사이공,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등 많은 뮤지컬 사운드트랙을 사서 들었다. 원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아무래도 음악과 가사가 잘 어우러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 후 둘째 낳고 부터는 우리나라에서 번안하여 많은 뮤지컬들이 상연되었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고, 지금도 뭐 뮤지컬(내한 공연을 포함하여)을 굳이 보러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노트르담 드 파리는 다르다. 대사 없이 모든 것이 노래로 이루어지고, 현대적인 무대, 수많은 댄서들의 군무 장면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또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젠체 하는 영국뮤지컬보다 녹음을 쓰더라고 더 다채로운 소리를 사용하는 프랑스 뮤지컬이 좋다. 박수도 마음대로 치고.ㅎ 여러차례 한국에 왔었다지만, 나는 딱 2005년에 보고 이번이 두번째다.

역시나 나의 최애 뮤지컬이었다. 행복한 세시간을 보냈다.

집에 와서 2005년에 공연을 본 후 구입했던 씨디를 꺼내봤다. 닳도록 들었던 그 노래들. 이번 공연 씨디는 품절이라고 해서, 스포티파이에서 찾아 다른 버전들을 들어보고 있다. 익숙해서겠지만, 나에게는 2004년 녹음버전이 제일 좋은 거 같다.


예술만큼 인생에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 아. 책이 있군.ㅎ


자, 이제 입원 가방을 쌀 기운이 생겼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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