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걷고, 수다떨고, 또 먹고
1월29일 새벽.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들었다. 아들은 한밤중의 대성통곡으로 불안했던 지난 보름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등록금 납부와 입학수속의 복잡하고 꼼꼼한 작업이 남았다.
불합격하고나면 곁에 있는 게 부담스러울 거 같아 계획한 제주행이었는데, 합격을 만 하루 지나 확인한 아들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비행기표를 바꾸고 각종 서류를 떼어 은행으로 향했다. 거액을 환전 송금하고 바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윤을 만나 함께 비행기를 탔다.
#법환_첫날
비행시간은 50분, 공항에서 법환까지는 1시간 30분. 오션트리 앞으로 마중나온 정언니와 김에게 가방을 맡기고 바로 숙소 옆집에 가서 우럭조림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미리 예약한 복층에는 더블베드만 2개. 다들 혼자 침실을 쓰는 50대라 방을 하나 더 얻고, 6개월만에 한데 모여 차를 마시며 그간의 소식을 나누고 신년타로를 봤다. 신년운, 직장운, 연애운, 자식운, 재물운...
점 같은 거 잘 안보지만, 타로는 믿는다. 경험적으로.
모두 한두가지 병을 가진 환우들답게, 11시가 취침시간. 남은 5일을 행복하게 지낼 생각에 흐뭇해하며 잘 잤다.
#법환_둘쨋날
이번 법환 환우회는 일명 힐링캠프.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고, 수다떠는 시간을 실컷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온 여행이었다. 나는 아침식사 담당을 자처해서 마치 흑백요리사 대결에 나가는 쉐프처럼 소금, 후추, 들기름 한병, 간단한 식재료에 그 무거운 핸드블렌더까지 챙겨오느라 짐이 15킬로나 되었다. 암환자가 된 후 맛있게 먹고 있는 음식들을 누군가와 나누어 함께 먹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게다가 대장에 병을 얻어 고생하고 있는 정언니에게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우리 중 가장 운동을 좋아하는 러너 김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빵과 커피를 사러 달려나가 유기농 밀만을 사용하는 미소제빵소에서 부드러운 통밀식빵을 사왔다. 똑똑하게도 커피를 샷으로만 받아 가져왔다. 러너가 달리는 사이 나는 병아리콩을 삶아 채소수프를 끓이고 어제밤 편의점에서 산 달걀로 간단한 달걀말이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김이 데려온 반려요거트가 모든 식탁에 함께 했다.
만족스럽고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전날 밤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위미의 동백군락지에 있는 동백수목원으로 향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동백숲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점심은 바당길이라는 곳에서 전복죽 보말죽에 톳칼국수를 먹었다. 먹었으면 걸어야 하는 환우회 원칙에 따라 슬슬 걷다가 한라봉 농장에서 집으로 한라봉도 보내고, 우연히 올레길 5코스 숲길을 걸었다. 몇년 전까지 그렇게 전투적으로 올레길을 걸으러 다녔었는데, 참 오래된 일 같다. 5코스는 혼자라면 걷지 못할 정도로 고요한 숲길과 풍광이 아름다운 검은모래 해안길을 품고 있었다. 걷다보니 쇠소깍. 언덕 위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반가운 한언니를 만났다.
한언니는 요즘 시를 열심히 써서 등단까지 해버린 정도인데, 시적인 구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용이네 식당의 두루치기를 참으로 맛깔나게 권했다. 지쳤을 땐? 두루치기(온갖 고기와 야채의 영양소를 섭취 서귀포 사람들은 힘들 땐 두루치기를 먹는다). 우울할 땐? 두루치기(타이밍에 맞춰 고기와 야채를 절묘하게 넣고 적당하게 볶아주는 데 집중하느라 우울함을 잊음). 기억의 한계로 그 맛깔난 문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번갯불에 콩볶듯 방2개에 거실이 딸린 가족실로 옮겼는데, 함께 지낼 공간이 있는 것은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역시나 침구가 낡고 방을 같이 쓰는 건 조금 불편했다. 여름에 올 땐 복층 하나에 트윈룸을 빌려야겠다 모두 생각했다.
#법환_셋쨋날
전날 한언니의 차를 타고 서귀포 이마트에서 장을 봐왔다. 과일과 채소를 예쁘게 써는 데 탁월한 김이 아름다운 색배합의 한접시를 썰어내고, 한언니가 손수 만든 귤잼에 삶은 달걀과 채소수프, 블루베리와 한라봉이 들어간 요거트로 행복한 두번째 아침식사를 했다.
밤새 토하느라 힘들었던 윤과 2학기 내내 수술 합병증으로 고생한 정언니는 한언니의 차를 타고 서귀포의 명의를 만나러 떠나고, 나는 러너 김을 따라 법환 해안길을 달리기로 했다. 봄날처럼 맑고 아름다운 햇살에 한라산까지 자태를 몸땅 드러낸 멋진 날이었다. 얼마나 달리고 싶었던 법환 해안길인가 말이다. 유채꽃까지 피어나 법환의 색채를 더욱 아름답게 했다. 등대까지 달려가 방파제 위에 앉아 바다를 실컷 만끽하고 다시 달려 돌아왔다. 다음 여름 법환 때는 달린 후에 꼭 용천수 목욕탕에 뛰어들 것을 약속했다.
병원 갔던 환우들이 돌아오고 대우정에서 고등어구이와 전복솥밥으로 한상 푸지게 먹었다. 한언니 차를 타고 중산간에 있는 포도뮤지엄에 특별전을 보러갔다. <Such Fragile Things>라고, 정혜신 씨 부부가 극찬을 했던 전시였다.
포도뮤지엄은 규모도 적당하고 컨셉도 좋아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양한 설치물과 몰입형 영상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작품들도 많았다. 하지만 야간의 숙면을 고려한 카페인 섭취 기한(오후 2시전)이 얼마 남지 않은 50대 여성인 5명에게는 카페가 우선이었다. 일단은 커피를 마시면 또 한참 수다와 웃음꽃을 피운 후(내용은 별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선덕여왕 어릴 때 같다는 한 언니의 자태에 모두 함께 빵터진 것만 기억난다. 수다는 내용보다 행복으로 기억되어 좋은 것이다.)
다양하고 즐거운 전시관람이었지만, 딱히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함께 해서 행복했다. 수없이 보았던 진보적 색채의 공감, 자유, 인간, 정치와 자본주의 비판의 주제의식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당위이 주제가 식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시대와 국가인 것이다. 작가들이 그 분야의 베테랑들이어서였을까. '전형성'을 뛰어넘지 못한 매우 평범한 전시였다고 느꼈다.
집에 돌아와 토마토카레를 밥통에 푹 고아 밥에 얹어먹고, 환우들의 건강을 위해 다린까지 1.5킬로를 걸어가 대추차와 쌍화차를 마셨다. 그리고 또 1.5킬로를 걸어 돌아왔다. 건강을 위한 법환이다.
#법환_넷쨋날
김이 사랑하는 치유의 숲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은 둘쨋날 용이네식당에서 다 먹지 못하고 가져온 두루치기 볶음밥을 다시 데워서 김에 싸먹었다. 수프는 양파와 양배추, 병아리콩, 브로콜리를 갈아 만들었다.
이날 아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점심도시락 메뉴인 당근계란김밥을 싸는 것이어서, 김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많은 당근을 썰기 시작했고, 중간에 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달걀은 아낌없이 풀어 부쳤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김밥김에 햇반으로 김밥을 싸서 도시락을 만들었다.
집 옆에 있는 카페 러디스에서 우도땅콩라떼로 카페인과 당을 한껏 충전하고 치유의 숲으로 나섰다.
2시간 넘게 치유의 숲을 걸었다. 한적한 숲길을 대화와 웃음으로 채우며 나무의 기운을 받았다.
치유의 숲과 근처에서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싸들고간 도시락을 찻집 옆 식사 공간에서 아주 맛나게 먹었다. 역시 김밥은 야외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버스를 타고 올레시장에 내려 귤떡을 먹으로 떡집으로 갔다. 전날까지 막내아들 졸업식날 선생님들께 어떤 선물을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것을 보내자 싶어 주문을 넣었다. 군고구마도 먹고 오뎅도 먹고 과즐도 사서 돌아왔다. 집에서 뒹굴뒹굴 쉬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1.5킬로를 걸어 법환포구로 향했다.
저녁은 모두의 염원대로 동환식당으로 정하였으나, 아쉽게도 문을 닫아 법환 <어멍네 들녘>에서 갈치조림과 솥밥 정식으로 실컷 먹었다. 갈치 뼈바르기의 일인자 김이 실력발휘를 제대로 했다. 나는 해녀인 어멍이 만든 밑반찬에 홀려 한그릇을 다 비웠다.
#법환_닷샛날
아침에 김은 미소제빵소까지 달리러 가서 맛있는 빵을 사오고, 나는 오늘 부산으로 돌아가는 정언니를 위해 조금 더 신경써서 수프를 만들었다. 그래봤자 똑같은 재료를 끓이고 갈아 내는 것이지만. 오늘의 포인트는 수프 위에 얹은 브로콜리랄까.
든든히 먹고나서 향한 곳은 산방산 탄산온천. 이전에 엄마랑 왔던 적이 있었던 곳이다. 산방산을 등지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 윤의 신묘한 발차기도 보았다.
관광객이 드글대는 노천탕도 좋았지만, 실내 욕장 중 탄산이 있다는 원탕에는 다양한 알록달록 수건을 뒤집어쓴 주민들이 터줏대감임을 증명하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원탕의 물보다는 그들의 모습 그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택시를 타고 모슬포 중앙식당에서 성게보말미역국을 먹었다. 새로 생긴 카페 위드썸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언니의 차시간이 다가와 버스를 태워 보냈다. 모슬포, 못살포, 못쓸포 답게 한라산이 가려주지 못하는 세찬 북풍을 온몸으로 맞다가 버스를 타고 법환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한언니 동네에서 매생이 전에 바지락비빔밥으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칼바람이 불어 어싱광장은 걸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법환_마지막 날
김과 함께 마지막 법환 러닝. 해가 돋는 바다와 맑은 범섬을 보며 즐겁게 달렸다.
진정한 냉털 요리로 마지막 아침을 만들었다. 병아리콩 남은 걸 갈아 소금 후추 들기름과 섞어 후무스 비슷한 걸 만들어서 바게트에 발라 먹었다. 씻고 후다닥 짐을 싸서 숙소를 나섰다. 제주시에 사는 이샘을 만나고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2018년에 보고 7년여만에 보는 샘은 편안해보였다. 세계일주 같은 다양한 여행을 사모님과 함께 즐기고 계신 샘. 인생의 숙제를 끝내고 날마다 축제처럼 살기로 하셨단다. 아직 할 숙제가 많이 남은 내 입장에서는 그저 부럽기만.
"(에너지를 뿜던) 김선옥을 만난다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삭은" 얼굴을 보고 내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라며, 이토록 상처주는 발언을 이렇게 감성적으로 하고 마는 이샘. 남말 하실 때가 아닌데.. ㅎ
제주 음식으로 정식을 차려내는 어군에서 접시를 싹싹 비웠다. 특히 멜조림을 배추에 얹어 먹는데, 진짜 아주, 최고였다. 먹느라 사진도 안찍어서 네이버에 있는 걸 퍼왔다. 갈치국도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닷가 빽다방에 데려가셨는데, 바다 전망이 환상적이었다. 커피값은 서울하고 같은데 말이다.
김이 노트북으로 정리해준 일정과 비용 덕분에 6일간의 기억을 잘 떠올릴 수 있었다. 김의 가벼운 엉덩이와 운동코칭, 환상적인 채소손질 솜씨와 단호한 결단력 덕분에 잔손 갈 일, 고민할 일이 별로 없었다. 무슨 일이든 긍정해주고 무엇이든 맛있게 먹어주고, 설거지를 완벽하게 하고, 농담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조용조용히 맞장구 쳐주고 무엇이든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정언니 덕분에 뭘 해도 힘들지 않았다. 놀라운 말솜씨와 더 놀라운 운전실력, 지치지 않는 창의력으로 함께 있으면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해준 한언니의 따뜻함 덕분에 나에게 서귀포는 '돌아갈 곳'이 되었다. 겨우 가전제품 구입할 때 유의할 점을 알려줄 때나 00대 나왔음을 인정받는 나로서는 이렇게 좋은 벗들이 있음을 큰 소리쳐 자랑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자, 이제 아프지 말고 잘 살다가 8월에 서귀포에서 다시 만나길.
그동안 우리가 서로 나눈 정보들로 구입한 헤라립밤, 이지듀 크림을 열심히 발라서 이뻐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