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기억

토막글

by smilemail

"저 왔어요."

잔소리에 못이겨 결국 왔다.


"아이고 아이고 왔나 우리 공주" 속 모르고 신난 할머니가 나를 안아준다.


"잠시 들렸어요. 바로 가야해요"

"과일이라도 먹고 가재 섭섭하구로"


내가 뭐가 그리 예쁠까, 그 마음에 생채 내기 싫어 못 이기고 따라 들어간다.

어릴 적, 궁궐 같다고 생각한 집은 처마가 부서지고 벽돌과 페이트는 벗겨져 있었다. 헤진 소파, 따로 놀아서 안 어울리는 식탁과 의자가 마음에 안들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멍하게 앉아 있는 나이 든 남자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눈은 나를 보고 있지만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바이요 장남 진석이 딸! 맏손녀!"


큰 소리가 귀에 다 들어가지 않았는지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앉아 있다. 노랗게 탄 장판과 오래된 가구들이 불편하기 이를데 없어 엉덩이를 떼고 나왔다. 작은 마당에 쌓인 돌과 막아 놓은 옥상 계단이 눈에 보인다.


왜 달려 있나, 문의 역할은 하는지, 털컹거리는 철문을 나와 맞은편 길가에 쪼그려 앉아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탁- 탁- 라이터 불씨에 연기가 난다.


후- 내뱉는 숨, 함께 퍼지는 담배연기

희미한 연기 사이로 검은 항공 점퍼에 구두를 신은 60대 남자가 허리만큼도 안자란 꼬마의 두 발 자전거를 힘껏 밀어준다. 자전거가 출발하고 날리는 먼지에 탁탁 바짓단을 터는 손길은 남자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느껴진다.


그때, 바지에서 진동 소리가 울린다.


"어 왔어, 아니 잘 계셔 근데 엄마, 할머니 집 수리 좀 해 너무 오래됬어 어.. 어 알겠어 응, 끊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설명에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연기를 들이킨다. 폐로 들어간 검은 연기에 기침이 난다. 콜록- 콜록-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하늘은 본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에 출발이 안 내켰는데, 역시나 하늘에 어두운 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툭- 투둑- 하나 둘, 쏟아지는 빗방울에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서 나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할아버지에 말이라도 걸까 싶어, 입술이 우물거리다 쏴르르 쏟아지는 빗소리에 창밖을 보았다. 그러다 창문에 가지런히 놓인 액자들이 눈에 보인다. 젊고 곧은 부부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을 지나 그들의 자식들, 또 그 자식들의 시간까지로 내려왔다. 이 시간들을 지금의 남자는 기억이 날까.


“비가 와가꼬 해상 공원을 못간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옆을 보니 할아버지의 시선이 창밖의 내리는 비에서 나로 옮겨졌다. 눈동자에는 분명히 내가 담겨있었다.


“아이참 너거 할배가 가만히 앉아만 있더만, 손녀 왔다꼬 뭐가 기억이 기웃기웃 하이네,”

할머니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아바이요 그때가 좋았느교?”

할아버지는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어린아이들이 재미있는게 뭐가 있을까, 손주들이 오면 택시 하던 운전 솜씨로 근처 가장 큰 공원에 데려다 주던 그때의 기억이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고였나보다. 귓가에 빗소리는 계속 들리고, 내 머릿속에도 늙은 사내에 대한 기억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꽃을 튀기며 집을 수리하면서 흘린 땀방울

목이 늘어난 하얀색 민소매

믹스 커피, 두 스푼의 흑설탕

화한 담배향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툭, 툭, 툭 소나기였을까, 얇아지는 빗방울에 할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아본다.

"저 가요" 그친 비 때문일까, 그의 눈동자에 나는 어느새 사라졌다. 대문을 나서며 다시 돌아본다. 낡은 집이 다시끔 나를 화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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