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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 Nov 11. 2024

관심에 울고 웃는

스포트라이터, 투명막을 뚫고 나오다


SNS를 자유롭게 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최근 2년 사이에 SNS 부캐인 '두두'와 조금씩 친해지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나를 표현하고 싶어도 충분히 건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커져가는 자기표현 욕구와 반대로 공개적인 온라인 플랫폼에 글을 쓴다거나 사진을 게재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관심을 바라는 마음이 모순적으로 표현을 억제하도록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해온 자아성장 플랫폼 밑미(Meet me) 덕분에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부터이다. 그동안 쌓인 기록을 공개적으로 오픈하는 기록 전시 <오프 더 레코드>에 참여했고, <오프 더 레코드>에서 전시를 보기 전 진행한 심리 테스트에서 ‘스포트라이터’라는 내면의 방해꾼이 있다고 나왔다.





관심에 웃는 주인공, 스포트라이터가
내면의 방해꾼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나를 더 꾸미도록 부추겨요.






돌이켜보니 지난 12년 동안 넓고 얕게 흘러넘치는 취미(프렌치 자수, 암벽등반, 데이터 자격증, 수제 맥주 만들기)  관심사(재즈 페스티벌, 내추럴 와인, 비거니즘, 동네고양이) 글 (에세이, 여성적 글쓰기, UXUI, 레슨런)을 꺼내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꺼내놓다 도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브런치도 2021년도에 ‘플렉시테리언 도전기’로 바짝 시작했다가 댓글과 무관심 속에 그만둔 채로 3년이 흘렀다.


이렇게 적고 보니 끈기가 부족한 스타일인 것도 맞다. 그런 면에서는 인스타그램이 화룡점정이었다. 개인 계정에 게시물 하나 올리는 게 생각보다 큰 심리적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게시물 하나에 무슨 용기까지 필요한 일일까 싶을 수 있지만 난 차분히 반응들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글 하나 올리면 당장 다른 사람의 좋아요, 반응, 댓글, 조회 수에 온 신경이 쏠렸다. 무시하는 법을 몰랐고, 건강한 자존감도 없었다. 댓글 하나라도 쌓일 때까지 초조하게 있다가 하나라도 달리면 세상의 인정을 받은 듯 행복했다. 지금에서야 '내가 뭐라도 돼? 그냥 올리고 싶은 거 올리자 ‘ 싶다. 하지만 이는 얼마 되지 않고, 24시간이면 사라지는 포맷의 콘텐츠만 올리고 있다. 꽤 최근까지도 단 하나의 포스트 하나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소모적이다.


왜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상대방이 좋아할 것을 선별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딴에는 신경을 쓴 포스트들도 빛을 발하지도 못할 때는 세상에 외면받는 기분이었다. 고요 속에서의 외침처럼 몇 차례 문장 수집 계정에 게재한 문장 콘텐츠, 동네에서 발견한 여러 고양이 사진 연재한 것, 글과 사진으로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 주섬주섬 꺼내 세상에 내놓았지만 마치 달팽이가 살짝이라도 건드려지면 집에 쏙 들어가듯이, 내 인정 욕구는 끝내 계정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기록들을 도로 잠들게 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슬프다. 내가 열심히 한 일에 대해 스스로만 만족한다면 그게 과연 소용이 있을까? 댓글이 하나하나 달릴 때마다 제일 행복하다. 반면에 그 인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마침내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은 고요 속의 외침으로 끝날 때 나는 무너진다.

2022.12.04 쓴 브런치 서랍 속 잠자던 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SNS가 처음 세상에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개인적이면서도 아날로그 한 기록을 주로 하면서 지냈다. 매일 펜을 들어 한쪽의 일기를 쓰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인화하며 지금까지 모은 일기장만 30권, 필름 카메라 롤만 100장이다. 전 세계가 디지털 세상 속에서 연결되는 동안 작고 안락한 세상 속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믿을 수 있는 주변의 이들에게만 관심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이솝 우화의 <신포도 우화>처럼 오히려 그런 관심 경제, 과도한 경쟁 기반의 SNS가 내겐 하등 도움 될 것 없다고 믿은 적도 꽤 있다. 물론 지나쳐서 인생에 문제가 되는 지경에 이르는 상황은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것과 반대로 결핍의 상태여서 아무도 볼 수 없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마치 투명 공작새가 된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이것저것을 찾다가 드디어 소수의 커뮤니티만 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았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안전히 보금자리로 만들자 나는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내게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싶고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정이 들게끔, 단 한 명에게라도 유용한 걸 심어주고 싶다. 그런 일을 하면 자기 효능감이 올라간다. 꼭 공감하지 않아도 괜찮다지만 무언가라도 가져갈만한 걸 줄 수 있으면 좋겠다.

2022.12.04 쓴 브런치 서랍 속 잠자던 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를 드러내도 응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에서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렀다. 함께 참여하는 메이트들의 응원이 쌓여서 관심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니까 기분이 우선 너무 좋았고, 유난히 이런 것에 민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관심을 갈구하는 인정 욕구가 스스로 바라봐지길 원하는 꽃이라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이 토양처럼 두툼하게 깔려있었다. 이를 알아차리고 나니 조금 자유로워졌다. 지금도 인정 욕구는 나의 본능이지만, 과도할 때가 되면 스스로 절제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다.





삶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 혹은 사회적 기준에 놓고
자신의 성과나 능력, 상황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이에요.

기준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을 때
우리는 외부에 휩쓸리고 불만스러운 삶을 살게 돼요.




과도한 경쟁, 과시, 광고로 SNS에 지쳐있다면 이곳에 와보는 것도 좋다. 왜냐면 SNS와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추얼 마을"에서 만난 "리추얼 메이커"와 "리추얼 메이트"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때로는 따스운 말 한마디, 따봉을 날린다.


나를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닌, 나의 기준에 나의 리듬에 맞게 나만의 시간을 지키게끔 도와주며 댓글도 달리고 소통할 수 있어서 든든하다.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결핍과 짜증과, 슬픔과 괴로움이 비단 나에게만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주 연약한 부분을 보여주고 상처를 보여주면 그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애써준다.




그렇지만 무너지기 때문에 다시 일어선다. 아직 포기하지 않기로 글을 적는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괜찮다. 나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2022.12.04 쓴 브런치 서랍 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지난 2년간 나를 건강히 드러내는 프로젝트는 투명 깃털들에 색깔을 입혀주고 있다. 세상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지도 않고, 내게 마음에 드는 색깔이면 가능한 한 정성껏 스스로를 칠한다. 그러다 '스포트라이터' (앞서 언급한 밑미의 기록전시에 나오는 관심을 갈구하는 내면의 방해꾼) 기질이 발동하면, 남들도 좋아할 수 있으면서 나도 좋아하는 색깔로 합의를 볼 수도 있다. 두려워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준다. 그렇게 투명한 막을 뚫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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