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볼 때, 주인공 혜원(김태리)이의 감정선에 몰입하며 보았었다. 수능이 끝나고 갑자기 사라진 엄마. 대학을 혼자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직을 준비하며 학원 강의를 들으며 힘들게 지내는 청춘들의 영화였는데 20대 겪어봤으니 '아프니까 청춘이다' 고로 청춘은 아픈 거다를 공감하며 봤었다. 20대 시절은 정말 매운맛을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거 같다. 학생으로 안전하게 지내다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뎌야 하고, 그걸로 '나'라는 사람을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힘들었던 거 같다. 사회는 냉혹했던 거 같다. 약육강식.
혜원이는 엄마와 둘이서만 지냈었는데, 고3수능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그동안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갑자기 떠난다는 설정이 정말 말이 안 된다 생각했었다. 혜원이가 느꼈을 배신감에 공감하며 봤었다. 어떻게 엄마가 저래! 말도 안 돼! 이러믄서..
원작이 일본 작가이기에 '아 일본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긴 했다. 일본 사람들은 속 내를 많이 감추는 편이라니 그럴 수 있지 생각했다. 그래도, 한국의 엄마들과는 정말 맞지 않는다. 한국의 엄마들은 엄청 잔소리하며 딸에게 욕도 한 바가지씩 하면서 늘 '너 때문에 못살겠다. 너 다 크면 떠나라. 같이 못살겠다 징글징글하다.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등등의 온갖 모질고 저주의 말들을 퍼부을지언정 떠나지 않고 옆에 있는 게 특징이다. (차라리 떠나줬더라면.. 그런 생각도 살며시 드는데)
암튼 한국 엄마들은 자식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자기희생으로 점철해 왔었다. 나의 엄마도 그랬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관점도 달라진다. 이제야 당시 우리 엄마가 조금씩 이해가 된다.
아들 두 녀석은 늘 양말을 벗어서 아무 데다 던져둔다. 옷도. 잠바도. 가방도. 한 번도 정리하거나 제자리에 둔 적이 없다. 그래서 매일 훈련을 시키고 있다. 바로바로 정리하기 훈련! 씻고 나면 옷을 빨래통에 넣기와 학교 다녀온 뒤 가방을 한쪽에 잘 나두기. 장난감을 갖고 놀면 정리하기. 자기가 만진 물건은 제자리에 놔두기.
뭐, 이런 것들을 벌써 1년이 넘게 해오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늘 뒤집힌 채 벗어둔 옷이나 양말이 구석 어딘가에서 나온다. 식탁 아래에 있어서 꺼내기도 힘들다.
매번 그렇게 해두는 모습을 어떤 날은 참아주지 못하겠다. 조금이라도 엄마의 노고를 안다면 이럴 수 있을까? 나도 울 엄마의 귀한 딸이었어. 비록 귀한 대접은 받아본 적 별로 없지만, 나 자신을 귀하고 소중한 인격체라고 생각하는데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이제는 제법 커져서 귀엽지도 않은 데다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노력하지 않고 엄마 말을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에 너무 화가 난다.
나도 두 녀석을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딱! 무릎을 치며 생각났던 게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 엄마였다.
그녀도 그런 마음으로 참고 버티다가 떠나갔구나. 모든 엄마들이 힘들구나! 그러면서 혜원이가 아니라 혜원이 엄마에게 공감이 되었다. 비록 영화는 혜원이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혜원이는 갑자기 떠난 엄마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과 상처가 있지만 이 영화를 혜원엄마에게 초점을 맞추면 새로운 스토리가 나올 거 같다. 엄마들이 공감할 스토리. 그리고 영화 끝엔 엄마가 돌아온다. 엄마와의 해후가 직접 담기진 않았지만, 약간 뽀샤시 하게 환상처럼 표현했다.
혜원이 엄마는 얼마나 참고 참았던지 갑자기 떠나버렸다. 그런데, 떠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고, 자녀에게도 상처가 되니 미리미리 그때그때 풀면서 사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인은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와서 아이를 보지도 못하고 안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른 복직해 아이로부터 도망갔었다고 했다. 남편이 엄마대신 아이를 키웠는데, 지금은 그때의 자신이 너무나 후회되고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잘해준다고 했다.
그때 문득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에게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시모토 갑상선염이 있는 상태에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갑상선은 저하증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했고, 갑상선암으로 갑상선을 잃는 투혼을 벌였음에도 아이들은 엄마의 노고를 몰라줬다.
아니, 알고 있어도 그것과 별개로 엄마는 자신들에게 밥을 해주고, 설거지 하고, 빨래를 해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엄마도 금쪽이처럼 소중하고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나 보다.
어떤 날은 아이들을 잠깐도 받아줄 여유가 없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내가 위험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날은 몰래 아이들이 아닌 나에게 선물을 한다. 아이들 없이 혼자 맛있는 거 사 먹기. 아이들 빼고 혼자 재미있는 영화 보기. 아이들 놔두고 혼자 바람 쐬고 오기.
그런 소소한 것으로 아이들을 잠시 잊으려 한다. 그러면 나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다시 잘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자녀는 어릴 적에 평생의 효도를 이미 다 했다고. 그렇지.. 그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던지. 내 품에 쏙 들어와서 안겨있었고, 나에게 충만감을 줬지. 나에게 행복감을 늘 줬지.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지.
오물오물하던 동그란 입술이며, 양볼이 다람쥐처럼 볼록한 거며, 입술에 잔뜩 묻은 음식물이며, 작은 손이며, 작은 발이며, 아장아장 걸어서 나에게 와서 안기며 웃었던 것이며,
말을 하기 시작하며 엄마라고 불러줬던 것이며, 모든 게 처음 느껴보는 순도 200퍼센트의 감동과 행복이었지.
그러니 지금은 그때 추억을 꺼내 보며 버티자. 그리고 애들이 너무 미울 때는 나 혼자 맛있는 거 사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