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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Dec 11. 2021

 아빠가 이해 된다.

지금 코로나를 지나고 있다. 살면서 이런 큰 변화와 위기를 경험한 세대가 얼마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실은 이런 위기와 고통은 늘 우리 주위에 있다. 

페스트로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고, 1차 , 2차 세계 대전으로 가정들마다 가장을 잃고,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늘어났었다. 

가난과 고통, 전쟁과 질병 이러한 것들은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 늘 있었다. 

나는 그나마 운 좋게도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환경이 오염되어서 위기에 놓였지만, 가장 발달된 사회에 태어났다. 

가장 발달된 사회에 태어난 걸로 치자면 지금 막 태어난 아이들에 비할 수는 없지만. 

 한국은 전 세계에서도 몇 위 안에 들 정도의 경제 강국이며, 지금은 문화강국까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분단국가에 태어나서 불안했던 적도 있다. 전쟁이 언제 다시 발발할까 걱정했던 시기도 있고, 북한이 핵 버튼을 눌러서 우리 모두가 죽거나, 큰 장애를 입은 채 살아가게 되거나 종말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을 가끔씩 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그래도 내가 전쟁과 일본 식민지 경험과 직접 연관된 적은 없었다. 부모님 세대들이 말하는 전쟁과 가난은 그냥 옛날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와 연관되어있고, 나의 뿌리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한 번도 전쟁과 식민지배당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얘기하지 않으셨다. 그냥 좋은 얘기만 하셨기에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유품에는 일제 강제 징용된 사람들 보상을 위한 신청 서류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친할아버지는 일제 식민시대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에서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셨다. 그러다,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입게 되셔서 한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여러 방면으로 치료와 보상을 받고자 노력하신 듯하나 뜻대로 되지 않으셨던지 모두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장애를 입은 친할아버지는 평생 집에 계셨고, 친할머니가 일하셔서 살아가셨다고 한다. 

여기부터는 나의 추측인데, 친할아버지는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고, 불구가 된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술을 의지하며 지내신 듯하다. 


그런데, 이런 것을 내가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나. 바로 나의 아버지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해양 공무원이셨다. 출장 중에 불의의 사고로 크레인? 과 같은 것이 아버지 쪽으로 쓰러져서 다리에 부상을 입으셨다. 다리뼈가 산산조각 났기에 다시 걷게 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당시 아빠는 죽을 정도로 괴로워하셨다. 엄마는 늘 얘기하곤 했는데, "다리를 다친 후로 변해버렸어"라고 하셨다. 즉, 안 좋게 변하셨었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당시 엄마는 아빠 간병하러 인천으로 올라가셔서 고작 7살 8살 했던 나는 언니, 동생, 할머니와 지내야 했다. 

퇴원하고 오셨을 때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반가워서 "아빠~" 하며 안으려 했는데, 아빠는 "저리 가" 하고 우릴 밀쳐내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때의 당혹감과 낯선 아빠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빠는 자신의 아버지가 다리가 불구가 되고 평생을 비관하며 망가지는 것을 보았기에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에 던져졌다는 사실에 절망과 증오가 일어났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아빠가 아니라 두려움과 애증의 존재를 얻게 되었다. 점점 커가면서 아빠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아빠만 없으면 우리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자신의 아버지 명예 회복과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며 정부에서 공고문이 뜨면 준비해둔 서류를 제출하곤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이에 대한 증거가 서류로 있거나 하지 않았기에 당시 주변인들의 증거를 서류로 제출하였으나, 이제는 당시 증인들이 살아 있기 힘들 만큼 시간이 지났기에 이마저도 쉽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거절당하셨던지 모여진 서류와 사진들이 서글프게 남겨 있었다. 


나의 오늘은 어제 일어난 일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그런데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제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들이 오늘의 나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모두 전쟁과 식민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있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에게 잘 집과 옷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지만, 사랑과 다정함은 주지 못했다. 그저 희생하고 헌신하며 자식들을 위해 애써 일하신 모습을 보며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만, 부모님과 온전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부모들도 그렇게 자라왔고, 그렇게 습득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그런 얘기를 하셨다.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을 짐처럼 여겼다 라고. 

본인도 그렇게 우리를 생각하셨다. 싫은 짐은 아니고, 너무 귀한 짐이었기에 자신의 인생과 시간들을 다 나눠 주셨다. 그런데, 함께한 기억은 없다. 각자의 방에서 있었고, 밥 먹을 때와 티브이를 볼 때 만났다. 그런데, 만나도 특별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예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전쟁을 묻은 땅>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영화에 보이는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스토리에서 인물에서 찾아서 썼었다. 이제 와서 보니 내 이야기다. 내 마음의 땅 속에는 전쟁이 묻혀 있었다. 식민지배로 인한 억울함과 한이 묻어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모른 채 살아왔지만, 전쟁이 피워낸 가시덩굴에 발이 걸려 넘어져 땅을 파보니 내 마음속에 이런 게 묻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그랬구나' 라며 나의 미스터리 같은 실마리들을 풀려서 나를 이해하고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 

이제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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