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날 Jun 07. 2022

영화제목이 없는 영화리뷰

 최근에 본 영화가 꽤 많다. 영화과와 영상이론과를 전공하며 햇수 10년동안 수많은 영화를 봤었기도 하고, 싫은 영화도 억지로 봐야했었다. 영화과 2학년까지는 영화를 꽤 봤지만, 그 이후로는 영화를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편하게 영화를 보며 감상에 젖을 수 없었고, 늘 영화의 컷을 분석하며 촬영을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잘 만든 영화를 보면 며칠이고 그 영화만 생각났다. 영화속에서 헤어나오기가 참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영화를 보았다. 그래야 이전 영화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최근에 여러편의 영화를 봤다지만, 누군가가 내가 몇 편의 영화를 봤는지 듣는다면 비웃을 수도 있다. 너무 조금 봤다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상이론과를 다닐적에 최근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1년 전의 영화를 골라서 리뷰를 써서 냈는데, 그게 정말로 내가 본 최근 영화였던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게 최근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눈꼽만큼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 영화가 최근영화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질문하는데 민망하면서 현실 인식이 됬다. "영화 볼 시간이 없어서 그나마 제가 최근 본 영화라서 썼어요" 라고 말하자 다시 한번 더 공격의 화살처럼 질문이 날아왔다. "영상이론전공하는 사람이 영화를 안봐요?" 


나는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영화과를 이미 5년만에 졸업하였고 사회로 나가서 영화 현장이든 제작사나 기획사나 영화제 사무실에 들어가서 뭐라도 하고 있엇어야 했을 나이였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더 학교에 갔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영화 현장이 겁이 났었고 내가 꿈꾸던 게 현실과 맞지 않아서 적지 않은 갈등과 충격으로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었던 탓도 있었다. 


나는 서울에 거할 곳이 필요했는데, 돈도 없었고, 일할 생각도 없었으니 원룸이나 고시원 같은 곳을 구할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게 학교 기숙사였다. 기숙사가 있는 대학을 선택해서 더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같은 지방의 소도시 출신의 여성은 서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는 서울에서 잘못하다간 눈뜨고 코베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불안해 했다. 

원체 겁이 많고 염려가 많은 스타일이어서 영화 현장을 갈 자신이 없었다. 연출부 막내, 스크립터를 하면서 현장의 수많은 사람들과 남자들로 부터 나를 보호할 자신이 없었던 게다.. 당시 그런 얘기가 있었다. 

여자가 연출부 막내로 들어가면 감독에게 따먹힌다고. 상스런 표현이었는데, 당시에 친구들은 그렇게 얘길했었고, 누구누구가 따먹혔는지를 얘기했다. 

마치 너도 가면 그렇게 될텐데 가지마 라고 들려왓다. 나같은 거절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에게 영화현장은 두려운 곳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힘이 생겨서 나를 지키고, 쉽게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꺼 같지만, 당시 24살의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누군들 그때의 24살은 그랬을 것이다. 지금으로 벌써 20년 전이니까.

지금이야 미투운동으로 영화 감독들이 배우들을 성추행과 성폭력을 일삼았다는 옛 일들도 다 폭로되고 있으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꺼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만 해도 그런 것에 대해 피해를 봤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내 내면이 너무나 약했기에 나는 내 꿈인 영화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포기라고 하기 보다 더 맞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들이었다. 나의 약한 체력과 생각많은 기질은 현장의 밤샘 작업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번 촬영하며 밤샘을 하며 촬영을 해봤는데,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으로 견디기 힘들어했다. 해보지 않았으면 아쉬웠을 텐데 학생 영화라도 찍으며 해보았기에 아쉬움이 아니라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깨달으며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 컷 한컷 밤 새 촬영하며 몸을 쓰는게 아니라 다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생각하고 글쓰며 머리를 쓰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비겁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고, 당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길을 선택 하게 된 것이 참 신기하리만치 나의 운명과 들어맞는다 생각을 했다. 

영화과 3학년때인가 외부 대학 강사가 와서 하는 이론 수업을 들었는데, 그 외부 강사는 전혀 새로운 영화와 새로운 글들을 가져와서 우리에게 읽게 하고 보게 하였다. 

자신이 쓴 아주 거대한 분량의 논문을 읽게 했는데, 읽으면서 질려버리게 만드는 긴 글이었다. 

그래도 그 강사가 과제로 내준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꽤나 재미있었다. 그때는 내가 가장 힘든 시기였기에 내 글은 독을 담고 잇었고, 세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아마 맛으로 따지자면 쓰고 진한 한약맛이었으리라. 달콤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쓴 맛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수업중 강사는 갑자기 나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전후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강사는 나에게 갑자기 내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순간에 맞추어 온 사자와 같이 메신저처럼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학생은 이론을 해야해. 외계인이 외계인을 알아보듯 나는 알아볼 수 있어."

그 말을 남기고 강사는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그 수업이 없어졌다. 그 말을 나에게 해주기 위해 그 수업을 개설하고 과제를 내준 사람처럼 나에게 진심으로 눈을 맞추고 열정적으로 말해주셨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했을까? 아니다. 난 결코 듣지 못했다. 


 나는 그 시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 많은 생각을 글로 적으며 매일 허무함과 싸우고 울며 잠들거나 아침부터 우울감과 싸워야 할정도로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있었다. 그 강사의 얘기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게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안에 갇힌 것처럼 두렵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중 신앙을 갖게 되면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 당시의 상황을 얘기해보겠다. 신앙을 가져서 살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나의 그 이전은 이틀에 한번씩 찾아오는 우울감으로 고통당하며 죽음만이 탈출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살고 싶어서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당시 정부행정병으로 군복무하던 남자친구뿐이었는데,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울면서)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도와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라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반복하면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일기장에 기도처럼 예수님을 떠올리며, 당신이 살아 있다면 나를 제발 살려달라고 적었다. 

갑자기 예수님이 생각났다는 게 의아하겠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성당을 다녔었기에 약간의 정보는 있었다. 가족 모두 카톨릭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세례도 받았고, 19살까지 쭈욱 성당을 다녔다. 

그런데, 그냥 다녔다는 말이 정확하였고, 몸만 다녔고, 믿음과 신앙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엄마의 강요에 갔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앉아서 설교말씀을 들으며 딴 생각을 하거나 졸다가 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딴짓을 하였기에 당시 신부님께 혼나기도 했는데, 너무나 엄하게 혼내던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미사 중에 성당의 장의자 위를 걸어다니는 상상을 하며 미사 시간을 버텼다. 그렇게 대학을 들어가며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면서 종교는 끝내버렸다. 인간이 나약해서 만든 종교라 생각했고, 신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났다. 이 부분을 얘기하자면 너무나 설명이 긴데, 간단히 설명해 보려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정직하고 옳고, 바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 분은 죄가 없고 잘못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신이라고 생각했었나? 

몇 달전에 길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다며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때마침 같은과 단짝친구 2명이 갑자기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왕왕들으며 저항하고 있던 터였다. 아차,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싶었지만 교회는 가기 싫어했다는 것을 놓칠뻔했다. 나는 교회가 싫었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닥치는대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읽기를 한지 6개월정도 지나서 부터 우울증이 심해졌던 것 같다. 


 나는 어릴적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혀 그 기도들은 하늘을 뚫고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날 밤에 한 기도는 하늘을 뚫었다. 그렇게 일기에 적은 기도는 다음날 효력이 발생했다. 

당신이 진짜 살아 있다면, 저를 살려주세요

 그 날 아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상쾌함과 경쾌함이 있었다. 햇살이 내 얼굴을 드리우며 내리쬐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새소리는 밝고 사랑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 속 무조건 해피엔등으로만 끝나야 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강렬한 햇살과 밝은 톤의 아침 장면처럼 선명하고 깨끗했다. 

그렇게 경쾌하고 아름답고 따뜻함 속에 눈을 뜨면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신을 믿어야겠다. 신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다른 것은 다 의심하더라도 신이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을 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서 내 발로 교회란 곳에 찾아갔다. 그 뒤에 펼쳐진 수많은 이야기들은 너무 많아서 다 꺼내지도 못할것이다.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내가 왜 갑자기 하루만에 바뀔 수 있었는지이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웠고, 아무 지식이 없었고, 우울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울증에서 벗어났고, 유신론자가 되었으며, 나의 상처들을 씻고 치료할 수 있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대상을 예수님으로 정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보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구절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찾다가 하나를 붙들고 당겼는데, 제대로 찾은 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체였기에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성당을 다니면서 기도했던 적도 있었으나 나는 예수님을 몰랐고, 하나님도 잘 몰랐다. 

그리고 매개자로 인해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니 내 기도는 주소가 정확하지 않아 수취인불명 편지와 같았다. 


내가 최근에 본 영화를 이야기 하려다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정작 영화얘기는 하지도 못했다. 영화들은 항상 약간의 기대감과 즐거움과 행복감과 무기력감을 갖다준다. 그리고 감동을 갖다주는 작품을 종종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영화 속에 잠기게 되는데 오이가 피클이 되는 것처럼 나도 영화에 잠겨서 일상과 내가 낯설어진다. 나의 하루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허무주의까지 가곤 한다. 

그런 나이기에 좋은 영화를 보면서 좋은 자극이 있고, 한편으로는 괴롭기도 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지낸게 벌써 10년도 넘었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영화보기는 꿈도 못꿨고, 그나마 아이들과 함께 애니메이션만 보았다. (아, 요즘 가끔 쿠팡플레이를 통해 한두편씩 보고 있다)

그런 내가 영화도 조금씩 보면서 글도 다시 쓰게되었는데, 이게 참 먼길을 돌아서 다시 원위치로 온것 처럼 쑥쓰러우면서 내가 이길에 온적이 있었지 하며 흔적을 찾아가게 된다. 

장기수로 감옥에서 세상을 잊은 채 지내다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모든게 낯설고 신기하고 아련하다.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처음 보고 배우는 것처럼 신기하다. 나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었더라 생각하면 참 모든 게 낯설고 다시 해석이 된다. 비로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중독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