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Civil War(군사혁신의 성패)

by 글쓰는 직장인

19세기 미국에서는 노예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북부의 연방주의자들과 남부의 분리주의자들 간 내전이 발발하였다.


전쟁 전에 새롭게 개발된 개틀링 기관총에 영향으로 사상자의 규모나 부상 정도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칼이나 활 같은 냉병기에서 기관총 같은 열병기가 진정한 주역이 되는 현대 전쟁이 출현한 시점이었다.



개틀링.jpg 개틀링 박사와 개틀링 기관총(출처: 국방홍보원) 1명이 100명 몫을 하니 군인이 줄어들거라고 개발했다.


하지만 미국을 이주민들이 사는 신세계 오지 정도로 취급한 유럽의 군인들은 남북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고 전장에 등장한 새로운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였다.


변화를 미리 감지할 기회는 얼마 후 유럽 열강의 한축인 영국에게 찾아왔다. 아프리카 식민화를 둘러싸고 동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남아프리카에서는 네덜란드계 이주민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였다. 신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구식무기를 들고 상대가 돌격하고 단기간에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게 되는 결과를 목격하였지만 자국군의 우월성일 뿐 전쟁이 변화한다는 생각은 못하였다. 크게 검토가치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1차 대전 때는 영국도 육전에서 대열을 유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하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전술, 전열보병의 선형돌격을 독일군을 대상으로 재현하였다. 독일군도 동일한 전술을 펼쳤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결과는 참혹하였다. 전선에서는 불과 1~2주에 수십만의 젊은이가 참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1km를 차지하기 위해 수십, 수백만의 목숨이 바쳐진 이 전쟁을 다룬 영화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소모전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물론 후방의 가족에게까지 전사통지라는 결말로 잊히지 않는 상처를 입혔다.


결국 화약병기 시대의 새로운 돌파구는 탱크가 뚫었다. 탱크로 적의 전열을 돌파하고 후방을 포위하는 전략이 성공하면서 전방에서 면과 면을 맞대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보병도 역설적이지만 패배로써 구원받았다.


귀향한 군인과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헤피엔딩이었겠지만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유럽에는 더 큰 전쟁이 터지고 더 많은 이가 죽었다. 기갑전이야말로 사상자를 줄인다고 믿은 일부 군인들의 혁신적 제안은 더 큰 희생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어쩌면 핵억지력이라는 개념도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니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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