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단발머리 혜자, 그리고 민서
중학교 1학년,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그녀의 이름은 ‘혜자’였다. 나처럼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성격.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편안했다. 교실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웃던 혜자는, 나의 첫 번째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 인연은 중학교를 넘어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둘 다 같은 지방 출신이라 그런지 마음이 잘 맞았다. 대학 졸업 후엔 용인의 작은 직조회사에 나란히 입사해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다. 낯선 도시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던 건, 서로의 숨소리와 밤늦게 나누던 잡담이었다.
기숙사에서 우리는 ‘꼬마’와 ‘꼬꼬마’로 불렸다. 둘 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귀여운 맛이 있다며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그 별명 속엔 둘만의 웃음 코드가 있었다. 민서는 자기 키가 153cm라며 “난 모나미볼펜 153이야!” 하고 깔깔 웃곤 했다. 실제 모나미 볼펜 옆에 새겨진 ‘153’ 숫자를 떠올리며 웃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곤 했다. 지금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그 얘기를 꺼낸다. “이제 모나미 볼펜보다 더 작아진 거 아냐?” 하면서 말이다.
민서는 염색을 전공했고, 결국 홍대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진짜 멋진 친구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혼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에겐 늘 자극이 된다. 사람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이어가는 방법, 새로운 걸 배울 때의 열정… 나는 민서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어느 날,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민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 부족함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싶어. 그리고 조금 부족하지만 천천히 따라올 수 있는 아이들을 더 품어주고 싶어서 공부하는 거야.”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가벼운 농담도, 형식적인 위로도 없었다. 오랜 시간 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묵묵한 지지가 있었다.
민서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조금 앓았다고 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아주 미세하게 안면 근육이 움직인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가 웃을 때 코를 찡끗하거나 입술을 삐죽이는 것처럼, 민서의 표정도 그냥 민서다운 표정일 뿐이었다.
나는 종종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민서는 말없이, 혹은 짧은 한마디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야.” 그 말 한 줄이,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했다.
우리는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안부 문자를 매일 주고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만나면, 3~4시간은 지루할 틈 없이 수다를 떤다. 깔깔 웃다 헤어지고, 다음 약속을 잡지 않아도 괜찮다. 서로가 서로를 늘 멀리서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단발머리다. 중학교 때처럼, 어색한 듯 웃으며, 그러나 속으로는 단단히 이어져 있는—그런 단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