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서사를 읽을 때 나는 늘 ‘소설적 완성’과 ‘서술 윤리’ 사이에서 흔들린다.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어떤 작품은 증언과 존엄을 지키고, 어떤 작품은 서사 장치로 피해자를 소비한다. 김숨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그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체감했다.
이전에도 나는 작가의 같은 주제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와 [한 명]이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김숨 작가가 쓴 위안부 생존자와 관련한 다른 소설들이 있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읽은 다른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의 책 중 하나는 어린이 책인 이규희 작가의 [할머니의 수요일]이었다. 주인공 소녀가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를 인터뷰하며 일본에서 유학한 본인의 할머니 또한 위안부 생존자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어린이 책이지만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충분한 취재와 지식, 조심스러움으로 쓴 책이었다. 읽는 내내 그 존중이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었고 부모가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눠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하나둘 다 떠나면 안 되는데...... 다 떠나기 전에 하루빨리 일본이 진실을 밝히고 정식 사과를 해야 할 텐데...... 그래서 우리의 일이 역사에 올바로 남겨져야 할 텐데......"
(할머니의 수요일: 전자책 p125)
"할머니는 덧붙여 말해 주었다. 그동안 싱가포르와 캄보디아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훈이 할머니도, 중국 오지에 숨어 있던 위안부 할머니들도 고국을 찾아왔다고. 그 할머니들이 고국에 돌아와 가족을 찾고 나눔의 집 식구가 된 게 기뻤지만 한편으론 아직도 제2의 훈이 할머니들이 저 필리핀이나 태평양의 어느 외딴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다가 쓸쓸히 죽어갔을 걸 생각하면 목이 메어 온다고."
(할머니의 수요일: 전자책 P126)
다음 기억에 남는 책은 배우이면서 이제는 작가가 된 차인표 작가의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다. 차인표 작가는 '황순원 문학상 신진상'을 받았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어떤 분을 통해서였다. 이 책의 네덜란드어 번역을 고민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받은 자료를 읽게 됐다. 공식적인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소설 출간과 모든 게 흐린 상황이라 글과 관련된 뭐라도 하고 싶었다. 재작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를 읽으며 첫 장에서 시점의 선택이 가장 먼저 걸렸다. 문장도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 이 책을 소개한 분도 글이 우화처럼 쉽다고 했고 그런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의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필독 도서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의 운명이란 참 이상하지. 오래전에 차인표 작가가 쓴 책은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이 책을 누군가 옥스퍼드 대학의 한국어학과 교수에게 선물했고 이를 읽은 교수가 이 책을 학생들에게 알렸으니까. 거기엔 차인표 배우의 유명세와 옥스퍼드 대학이라는 권위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다.
이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건, 작가는 아마도 처음 소설을 쓰며 많이 헤맨 것 같다. 시점과 서사 라인, 문장 모든 부분에서 말이다. 어느 인터뷰에서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집자가 이를 잘 끌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장편을 내보니 편집자들은 작가의 책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관례인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를 만든 편집자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한국 정서에는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와 드라마를 하는 분이어서인지 엄청나게 많은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것도 괜찮다. 나는 마치 한 편의 복잡한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건 엔딩이었다.
백호를 잡으러 산으로 들어갔던 용이는 순이가 잡혀간 걸 알게 된다. 또 이 마을에서 지내며 순이를 사랑하게 된 일본인 장교 가즈오.
갑자기 나타난 용이가 혼자서 일본인 군인과 잡혀간 처녀들이 있는 곳을 공격하고 순이를 구한다. 순이와 산으로 도망친 용이를 집요하게 추적해, 아픈 순이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며 그는 순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순이는 그의 등에서 화해하는 듯한 말을 한다. 여기서 순이를 찾아내는 방식도 가즈오가 갑작스레 용서를 구하는 장면에 설득력을 떨어트린다. 그는 산지기를 고용해 순이를 찾는 집요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용서라고?
차인표 작가도 이규희 작가의 말처럼 "캄보디아의 훈이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분노해 이 글을 썼다고 했다.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펜을 잡았다는 작가의 포부에 비해, 이 글은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고 끝난다. 가즈오의 등에 업힌 순이에게 가즈오가 용서를 구하는 말을 하고 순이가 이를 수용하는 듯한 말을 한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 속 순이는 주체성이 전혀 없다. 그녀는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두 남자에게 운명을 온전히 맡기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그녀가 용서하기에 그녀는 위안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전에 용이가 영웅처럼 나타나 구출했으니까.
이 부분은 김숨 작가의 두 장편 소설과 한 권의 증언집과 너무나 비교된다. 김숨 작가의 글을 읽으면 더는 어떻게 위안부 생존자가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녀들이 어떤 식으로 그곳으로 끌려갔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또 우리는 이 증언이 현재까지도 어떤 식으로 무시되고 유린당하는지 알고 있다.
소설에서 그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그 시대를 여전히 반복해 살고 있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어떤 문장도 소설의 서사와 재미를 위해 쓰지 않은 걸 느꼈다. [한 명]은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 세상에 차마 말하지 못한 상처를 지닌 그 한 명의 이야기다. 마지막 남은 공식적인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여기, 여기 한 명이 더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존자의 이야기다. [간단후쿠]는 [한 명] 보다 더 직접적인 피해 당시를 말하고 있다. 아마도 김 숨 작가는 [한 명]으로는 이 폭력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긴 듯하다. 혹은 작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 피해와 폭력의 증언자가 되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간단 후크]는 우리가 아는 잔인한 모든 언어가 다른 단어로 치환된 이야기다. 한 장을 넘기는 게 무섭고 두렵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이 잔인하고 잔혹하며 짐승만도 못한 만행에 증인이 되라고 말한다.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집 [숭고함은 우리를 들여다보는 거야]는 어떻고. 이 책은 한 장을 넘기는 데, 며칠이 걸렸다. 김숨작가의 글을 읽으며 작가의 윤리성이 그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가는 꽤 오래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눈 듯했다. 십 년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들었다.
[간단후크]는 그 십 년의 이야기가 잔인한 은유와 환유로 돌아온 이야기다. 우리가 규정한 단어로는 그들이 당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이야기를 쓸 수 없다고 작가는 생각한듯하다. [간단후크]는 언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성(性)을 떠올리는 모든 단어를 고집스럽게 지웠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어찌 보면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의 언어였다. 자신의 신체를 아래라고 칭하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렸을 할머님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아주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주 많은 언어로 이 책이 번역되길 바란다. 그래서 위안부 생존자 할머님들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의 증인이 되길 바란다.
[간단후쿠 ]소설 중에서
간단 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 후쿠가 된다.
아니다. 내가 간단후쿠를 입는 것이 아니라 간단후쿠가 나를 입는 것이다. 간단후쿠를 입는 것은 간단후쿠로 되돌아가는 것이니까.-P4
아래가 느껴진다.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몸은 아래에서 시작해 아래에서 끝난다. 아니면 아래에서 끝난다. 아니면 아래에서 끝나 아래에서 시작된다.
아래는 묵처럼 흐물흐물하지만 쇠심줄처럼 질기다.
아래는 구멍이지만 구멍이 아니다.
아래는 입이 되기도 한다. 비명을 지고 있는 입. 비명은 누구에게도, 내게도 닿지 못한다. 아래는 비명을 지르다 기진맥진해 차라리 벙어리가 되거나 비명에 삼켜져 비명이 된다. P 27
오토상은 우리가 잊을까 봐 사흘돌이로 말한다. "너희는 천황이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이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군인들한테 봉사해야 한다." P51
나는 이름이 네 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인 개나리, 오토상이 지어 준 이름인 요코, 전투를 앞둔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교코.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온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아이코. 이름은 영혼이다. 그래서 내 몸에는 영혼 네 개가 모여 산다. 개나리, 요코, 교코, 아이코 P111
스즈랑의 여자애가 군인의 아기를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남자하고 여자가 자면 아기가 생긴다. 스즈랑의 여자애들은 군인과 잔다. 스즈랑의 여자애가 군인의 아기를 갖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건 쥐가 고양이의 새끼를 갖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나는 남자하고 여자가 자는 게 뭔지 정말로 모른다.
군인하고 여자애가 자는 게 뭔지도 진짜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군인하고 조센삐가 자는 게 뭔지는 알 것도 같다. 그건 만주 들판에서 군인이 조센삐를 데리고 벌이는 위문 공연이다.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