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는 그 아이들의 사과가 부족했다고 생각해.”
운전 중, 루이가 말했다. 나는 “사과?”라고 되물었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두 동급생이 루이의 뺨을 연달아 때렸다는 이야기였다. 놀람과 당황을 감추고 나는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놀다가 실수로 맞은 건지, 루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왜 반격하지 않았으며 선생님께 이 사실을 바로 알렸는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루이는 사과는 받았지만 억지였고, 선생님은 자세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세 개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루이는 당황하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루이는 두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 제대로 사과하길 바랐다. 나는 바로 교장과 루이 반 담임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건을 알렸다.
다음 날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학교 축제였다. 전교생과 부모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고 놀이를 즐기는 날이었다. 루이는 나를 끌어당기며 자신을 때린 아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 저기야. 혼내줘.”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며 루이에게 “나중에.”라고 말했다.
축제가 끝나고 정리하는데, 루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나는 아이에게 뭐가 속상한지 물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루이는 참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이들에게 맞을 때도 울지 않았다고 루이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고 말할 때 루이의 표정은 미묘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미소를 루이는 지었다.
“그래서 속상했구나. 엄마가 저 아이들에게 화를 낼 수도 있어. 엄마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어른이고 저 아이들은 아이들이야. 루이가 아파서 속상하지만, 우리는 규칙을 지키자. 저 아이들처럼 때리거나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 말고, 그 아이들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게 하자. 그리고 벌도 받아야지.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잘못된 행동이니까. 그 아이들의 부모도 함께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돼. 이제는 저 친구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야. 루이는 어른들이 어떻게 이 일을 바로잡는지 지켜보면 돼.”
석양이 루이 얼굴에 내려앉아 붉게 물들었다. 아마 루이가 보는 내 얼굴도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루이의 문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김교수와의 문제에도 갈팡질팡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부끄러움을 지는 태양이 감춰주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김교수와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교수라 불렀지만 후에 시간 강사인걸 알았다.
2023년 5월, 나는 중학교 친구를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우리는 레오폴드 뮤지엄 옆 카페에서 만났고, 그는 파오 간호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성공적이었다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후에 다시 물었을 땐 발표문이었다고 정정했다.) 그는 근처 대학에서 강의 중이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곳이었다.
그때 나는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를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파독 간호사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우아한 퀴어 소설이었다. 파독 광부나 간호사 이야기는 많았지만, 파오 간호사는 처음이었다.
1972~73년에 100여 명의 한국 간호사가 오스트리아로 갔다. 우리는 이들을 파오 간호사라고 불렀다. 후에 독일을 거쳐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간호사들이 합류하며 한인 커뮤니티를 세웠다. 흩어진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품은 기억들. 가난한 한국을 벗어나 유럽으로 온 여인들의 이야기는 소재를 찾던 내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김교수는 자신이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고, 한 작가와 함께 에세이를 쓰고 있으며, 그 작가가 원한다면 나도 함께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글을 쓰지 못한 채로 긴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좀 뭐라도 쓰고 싶었다. 육아, 낯선 환경, 언어 장벽등으로 글을 쓰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육아는 새로운 기쁨이기도 했지만, 온전히 내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게 문제였다. 그래도 아이를 재우고 꾸벅꾸벅 졸며 계속 글을 썼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 부단히 애쓰던 시기였다.
얼마 후 김교수는 함께하던 작가가 빠졌고,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사연자 한 분의 인터뷰를 받아 채록했고, 결을 살폈다. 연세가 많고 독일어를 모국어보다 오래 쓰신 분이어서 인터뷰 맥락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십 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작가와 김교수의 작업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싶었다. 나중에 나는 이때로 다시 돌아가 이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김교수는 엮은이 혹은 공저로 이름을 올리고 싶다고 했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 말이 불씨가 될 줄은 몰랐다. 글이야 같이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공저가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인터뷰 비디오를 채록하고, 초고를 썼고, 2차 질문지를 만들어 김교수에게 넘겼다. 그는 그걸 가지고 사연자들을 만나 2차 인터뷰를 했고, 나는 다시 채록해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15개월이 걸린 작업이었다. 그동안 나는 사연 동의서를 꼭 받으라고 김교수에게 거듭 요청했다. 이는 사연자들의 사진 사용과 2차 저작권 문제에 핵심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동의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나와 동의서를 공유하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몇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이를 무시했다. 공저나 엮은이를 원하면서 김교수는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이 또한 김교수 본인이 알아서 할 거라고 믿었다.
십오 개월 정도가 지나, 총 일곱 명의 사연으로 문학적 에세이를 완성했다.
출판사 몇 곳을 선정하고, 출판사에 맞는 기획서를 쓰고, 제출하는 일도 모두 내가 했다. 한 출판사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이 왔다. 김교수가 번역서를 낸 곳이어서 원고를 빨리 읽었다. 편집자는 원고와 사진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김교수가 인터뷰어의 역할을 했고 책에 기여자로 남을 수 있다고 알렸다.
김교수는 자기 이름을 기획자로 표기하고, ISBN 등록을 요구했다. 그는 한 문장도 쓰지 않았지만, 저자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작가만 허락하면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나는 그의 요구가 정당한지 알아보기 위해 저작권법과 논문 윤리, 출판 윤리 등을 몇 주간 공부했다. 그의 요구는 출판 윤리에도, 저작권법에도 어긋났다.
그는 협업 중에 파오 간호사 관련 논문을 학회에 발표했다. 표지 논란이 있기 전이었지만, 거기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이 사실을 몇 개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또한 기존 발표문에 비해 에세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발전한 그의 논문을 보자 씁쓸했다.
김교수는 전혀 쓰지 않고도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논문을 도운 내 권리는 무시했다. 나는 일 년 넘게 채록하고 에세이를 쓰고도 수고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사연자들에게 나 혼자 책을 내려한다는 말로 동의를 철회시키려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처음 이 일이 내게 닥쳤을 때, 루이의 말처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일로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침묵하거나 없던 일로 대하면 괜찮아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은 언제든 다시 쓰면 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계속 쓸 테니까.
루이에게 내가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건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규칙을 지키면서 상대가 잘못한 걸 알게 하는 것, 그리고 진정한 사과를 받는 것. 그렇게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했다. 정당한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는 더는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