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따돌림
스물두 번째 죽음이었습니다.
중략
스물세 번째 인간이여,
첫 번째 인간의 동지여,
두 번째 인간의 동생이여,
세 번째 인간의 친구여,
스물두 번째 인간의 부활이여,
죽음의 죽음이여,
삶의 삶이여,
이 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이 아니라면.
심보선의 <스물세 번째 인간> 중에서...
봄이 오기 전, 겨울이 막 지나갈 즈음에 이웃인 아네믹은 튤립 구군을 집 앞 길가에 심는다. 이 년 전에는 아네믹이 구멍을 파고 율과 폐가 튤립 구군을 구멍 안에 던지고 흙을 덮었다. (율과 폐는 아네믹의 아이들이다.) 이번 연도에는 키가 훌쩍 큰 페가 구멍을 파고 율과 아네믹이 구멍 안에 구근을 던졌다. 봄이면 푸른 새싹이 잡초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이내 색색의 선한 튤립이 꽃을 활짝 피웠다.
심보선의 <스물세 번째 인간>을 읽으며 불현듯 아네믹이 떠올랐다. 매년 겨울과 봄 사이에 그녀가 씨앗을 심는 게 꼭 '스물세 번째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잡초 사이에 꽂을 심는 사람,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 흙을 파헤쳐 씨앗을 뿌리는 사람, 자신의 행동이 이타적인 줄 모르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바로 그녀가 스물세 번째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별히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닌데, 요즘은 자연스레 스물세 번째 인간이 되고 있다. 어쩌면 스물두 번째 죽은 인간으로 누군가에게 우리 모두 스물세 번째 인간이 돼야 한다고 외치는 기분이다. 물론, 개인사가 얽혀있으니 온전히 이타적인 마음으로 이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새는 전사가 된 기분이다. 누군가의 욕심으로 엉망이 된 출판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루이의 학교 문제는 폭력과 인종차별이 섞여있어 그냥 아이들의 싸움으로 치부할 수가 없게 됐다.
우리는 바로 교장과 담임을 만났고 그들도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단은 학교를 믿어보기로 했는데, 일주일이 다 돼 가는 지금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루이를 때린 아이들이 '칭챙총'이라는 말을 하며 루이를 '차이니즈'라고 놀렸다는 사실이었다. 해외에 오래 있다 보니 "Are you Chines?"라는 물음은 더는 인종차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냥 내가 중국인인지 아닌지 궁금한 그 정도라고 생각하게 됐다.
루이에게도 중국인이냐고 묻는 친구가 있으면 '할프 코리안'이라고 답하라고 일러뒀다. 하지만 '칭챙총'은 다르다. 나는 아직도 이 '칭챙총'이 어쩌다가 인종차별적 발언이 됐는지 그 기원은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헌법, 1조에서는 분명하게 인종차별을 불법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생긴다. 따져 물으면 몰랐다느니, 농담이라는 둥의 시답지 않은 말로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이번에 학교는 아이들의 인종차별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루이가 아닌 가해자 아이들을 방어했다. 뜻을 모르고 하니 너그럽게 보라는 의미였다. 아이들이 루이를 때린 것도 놀이 중 일어난 분쟁으로 축소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정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렇게 많은 분쟁과 싸움, 희생이 있었어도, 이런 문제는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흐른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수많은 이유로 일을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정말 그럴까?
좋은 걸 좋게 넘어간다고 다친 마음이 괜찮아질 리 없다. 왕따 문제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그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마음과 몸이 상한 정도를 떠나서, 치유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응당 그래야 하듯,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이 요구된다.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까지 더해서.
심보선의 시는 어린아이들의 왕따 문제나, 인종차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건 그보다 대의에 가까운 어른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워 지키는 것, 그게 생존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어디서나 일어나는 이 작은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문제는 결국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네믹처럼 꽃을 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겨울의 끝자락에 구근을 심어 봄에 꽃을 피우는 인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우리 모두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많은 '스물세 번째 인간'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자면, 그게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불을 꺼뜨리는 물이 있다면
물을 증발시키는 불도 있다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뭔가 시작하려는
역설, 진동, 이끌림, 자기장의 형성
중략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육의 문제였다
자살과 살인, 죽음, 삶,
죽음의 죽음, 삶의 삶......
그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근육 안에 흐르는 전기의 세기와 방향
그것들이 문제였다
그 전기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모르는 구름에서 탄생했다
심보선 <근육의 문제> 중에서
* 심보선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