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관한,
폴란드로 출발하기 전에 장편 [토성의 계절에 그 아이들은] 조판 교정본과 표지를 보냈다.
별일이 없다면 장편이 출간되는데, 더는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인다.
폴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디자이너에게 표지 시안을 받아 출판사에 보냈고 다시 반려 됐다.
출판사에서 이전에 출간된 소설과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가 직접 디자이너를 구해 표지 디자인을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는데, 출판사의 배려로 가능했다. 결국엔 원하는 디자인은 아니고 원래 하려던 디자인으로 선택했다. 이번에 장편을 준비하며 많은 걸 배웠다. 그전까지는 그저 글을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은 책이 나오는 많은 과정 중에 하나라는 걸 배웠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장편을 출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쓰고 싶다. 그리고 문학상이 아닌 다른 과정으로 책을 출간하며 느낀 과정들도 공유하고 싶지만, 이게 또 너무 사소한 감정일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어젯밤에는 내년에 있을 공모전과 지원 사업을 정리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문학 공모전 말고는 다른 지원 사업은 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야가 좁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스물이나 서른의 어디를 지나고 있다고 믿었나 보다. 이런저런 공모전과 지원 사업을 알아보면서 코로나 때 온라인으로 캐나다 대학의 장편소설 강의를 들었던 게 기억났다.
장편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다. 주인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적대자와 보조자를 기록한다. 그들 사이에 이해와 갈등을 크고 작은 순으로, 혹은 시간 순으로 적는다. 이렇게 적다 보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자료가 나온다. 그리고 또 어떤 정보를 더 공부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글을 쓰다 보니 또 샛길로 빠졌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육 개월의 강의가 끝났을 때였다.
출판사에 투고할 때의 자세 같은 것들을 굉장히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리고 어떤 출판사에 투고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과 출판사들의 정보(이메일, 주소, 어떤 장르를 주로 취급하는지 등)가 기록된 자료를 준다. 그때 나는 일종의 영업 비밀을 공유받는 기분이었다. 우린(학교나 함께 글을 쓰던 친구들) 주로 우리가 알음알음, 그것도 떨어질 것을 대비해 비밀로 해왔던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내내 단편을 썼다. 쓴 단편을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내내 했다.
중편이나 장편을 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단편 하나 쓰기도 버거운데, 중편이나 장편을 쓰는 게 적절하지 않게 느껴졌고 일단 단편으로 등단한 후에 장편을 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건 온전히 내 생각만은 아니라 문창과에 다니는 많은 학생들이 그럴 것 같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내내 느끼는 건 나는 단편형 작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말이 많고 인물이 많으며 그 인물들이 얽혀있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 단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단선으로 주인공의 감정만을 따라가는 소설이 이제는 지루하다. 문장이 아무리 유려해도, 단편도 아닌 장편이 단선적이면 읽는 게 버겁게 느껴진다. 읽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면 시간 소설을 읽는 시간이 낭비같아진다. 그러면 빠르게 그 소설에 흥미를 잃는다.
또한, 장편에 쓸데없는 장면을 추가하거나 불필요한 대화로 페이지를 늘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 너무 싫어한다. 나는 페이지에 쓰인 모든 대화는 그 필요가 충족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단어나 설명이 많은 글을 읽을 때면 소설에서 페이지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밀도가 높은 소설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잘 쓰는 것, 그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요새는 소설도 홍보를 잘해서 광고만 보면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인기 드라마를 안 보면 대화에 낄 수 없는 것 같은 어떤 소외감을 느껴 충동 구매를 하게 된다. 나는 책을 충동 구매하는 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책을 구매해 계획한 책들보다 먼저 읽었는데, 광고만큼 흥미롭지 않으면 바로 낚였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하다. 최근에 이런 일을 좀 겪어서 책 광고에 신뢰도가 바닥이다.
작가란 뭘까. 이런 고민을 하게 하는 책들이 몇 있었다. 작가가 정확히는 소설가가 써야 하는 소설이란 뭘까? 조정래처럼 태백산맥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박경리처럼 토지를 쓰라는 것도 아닌데, 요새는 잘 팔린다는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건, 한국 문학에서 거대 담론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각기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데, 마치 한 작가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얼마 전에 [고래]를 쓴 천명관 작가가 나오는 프로 하나를 봤는데, 거기서 김중혁 작가가 요새 한국 소설이 소위 '순한 맛'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순화해서 말한 거라고 믿는다. 정말 순해도 너무 순해서 밍밍하다.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글쓰기'를 누른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이렇게 돼 버렸다. 최근에 한국 소설을 좀 읽었는데, 한강 작가 말고는 딱히 마음을 잡는 장편이 없다. 그래서 다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꺼내 들었다. 전에는 e-book으로 읽었고 이번에 조카가 보낸 짐에 종이 책이 있어 종이 책으로 천천히 다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처음 읽을 때는 연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됐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마치 [소년이 온다]의 연작 같다는. [소년이 온다]를 읽지 않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화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왜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집요하고 고통스러운 화두 때문이다. '폭력과 인간'이라는 화두는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러서는 작가와 화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오래 남는 작품이다. 이런 걸 '작품'이라고 부르는 거지. 천천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싶다.
처음엔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주절대는 잡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