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사진첩>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사진첩> 부분
봄날의 대학교 교정, 목련꽃 떨어지고, 벚꽃은 가고 젊은 영산홍과 등나무꽃이 즈이들 세상을 만났다. 초로의 얼굴들이 함박웃음을 띠고 40여 년 전의 어떤 날처럼 사진을 찍는다. 어색한 손으로 얼굴에 꽃받침을 하면서 까르륵거린다. 찍힌 사진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은퇴하면서 계획한 것 중 하나가 ’오래된 앨범을 정리하는 일‘이다. 크고, 두껍고 무거운 앨범 속에 가족의 한 때가 평안하게 남아 있다. 아이들이 가끔 자기 어린애 시절을 찾아볼 뿐 앨범은 웬만해선 열리지 않는다. 너무 오래되니 비닐은 뒤틀리고 접착제는 말라 떨어졌다. 차지하는 공간은 어찌나 넓은지. 사진 중에 남기고 싶은 것을 엄선하고 낡은 앨범은 처리해야 겠다고 계획했는데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다. 늙은 배우들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다 정리 했다고 하는 인터뷰를 보았다. 아쉽지 않더냐고 하는 사회자의 질문에 자신들이 떠나고 나면 정리하는 것이 자식들의 몫인데 뭣 하러 짐을 지우냐고 했다. 어버이날에 소고기를 잔뜩 사 들고 온 딸이 “엄마 집에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딸은 엄마의 물건들이 다 소용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라는 말로 응수했다. 사실은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낡은 사진첩을 구석에 쌓아두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경우라도 머물러 있지 않다. 순간순간 지나가 버린다.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않고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진이다. “그때였구나” “아 이런 날도 있었구나” 사진 속 얼굴들은 모두 웃고 있다. 앙앙 울어대는 사진을 찍을 때는 그 모습조차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어린애 시절뿐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울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웃는 모습만 사진으로 남아 있을뿐이다. 어버이날에 치매환자 어머니의 자녀들이 방문했다. 가져온 꽃바구니를 어머니 품에 안겨 함박웃음을 웃는 사진을 남기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훗날 그들은 사진을 보며 “엄마가 웃었다”라고 기억할까? “우리는 이만큼 엄마를 사랑했다”라고 기억할까? 그들이 떠난 직후 어머니는 “먹을 거나 사오지, 쓸데없이 꽃만” 이라고 말씀하셔서 우리를 웃겼다. 사진의 뒷면에 쓰인 이야기다.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그 사람의 어느 한 시절을 같이 기억한다. 사진의 앞면은 언제나 웃고 있지만 쓸쓸했거나 슬펐던 얼굴의 뒷면을 읽어낸다.
이제 사진첩은 거의 생성되지 않는다. 각자의 휴대폰 속에 저장될 뿐이다. 애인집에 방문해서 애인의 어린시절 사진을 들여다 보며 설레던 시간도 사라져간다. 이제는 사진의 뒷면에 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 보다 잘 포장된 사진의 앞면을 보며 감상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야기가 사라진 사진의 뒷면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