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 <자신의 날개를 믿지 않으면>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고
행 바꿀 때마다 글줄이 삐뚤지 않으면
시를 쓴 게 아니지
-류시화 시<자신의 날개를 믿지 않으면> 부분
어린 시절 사용하던 연필은 연필심이 자주 부러졌다. 흑연을 감싸고 있던 나무도 썩 좋은 것은 아니어서 연필을 깎을 때면 쪼개지기 일쑤였다. 글씨를 많이 쓰지 않아도 금방 몽당연필이 되곤 했다. 흐린 연필심으로 누런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고행이었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썼어도 받아쓰기는 백 점을 받지 못했다.
연필로 쓴 글은 두 줄로 긋는 대신 지우개로 지운다. 깨끗하게 지워진 글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퇴고를 거듭한 글은 처음 글이 아닌 경우가 많다. 지나간 앨범을 넘기며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더듬어 보듯 글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없다. 노트북에 쓴 글을 퇴고할 때는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를 해서 새로운 글을 만든 후 고친 부분을 표시해 둔다. 퇴고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쓰였던 단어들을 다시 가져오는 일도 있고, 의도했던 글에서 곁길로 샜을 때 원상태로 되돌리기 유용하다.
펜으로 쓴 글은 지워간 흔적과 다시 살려낸 문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그것은 내 고뇌의 흔적을 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이 더 좋다거나 하는 것을 주장할 수 없다. 당장은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글이라도 나중에 다시 읽으면 쓸모 있는 문장이 될 때가 있다. 쓰는 사람이 초고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이유다. 버려질 문장이라도 그 한 문장을 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알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어렵다. 연필심을 아무리 부러뜨려도 강제로 시를 쓸 수는 없다. 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책상에 앉아 있지 않는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어느 한순간 번득이며 뇌를 스치는 한 단어, 한 문장, 한 이미지가 시가 오는 순간이다.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다른 글을 쓰다가 벌어지는 일이다. 시를 만나기 위해 산책을 한다. 된더위가 계속되어 새벽 산책을 시작했다. 새벽에 만나는 사물들은 또 다른 세상이다. 요즘은 글쓰기의 시간과 산책 시간이 서로 선후를 다투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산책을 하는 것인데, 가끔 산책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느리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말이 달리기지 걷는 것보다 느리고 힘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것도 운동이 될까 싶은데 몇 주를 달리고 나니 몸살이 온다. 발끝부터 엉덩관절까지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꾀를 깔까 싶어도 운동복을 입고 현관을 나선다. 조금 전 힘들어했던 생각은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글쓰기를 할 때도 그렇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떻게 서두를 잡아야 할지 막막할 때, 우선 노트북을 켜고 깨끗한 새 게시판 하나를 열어 놓는다. 그리고 쓴다. 그냥 쓴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뇌에서 뭔가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쓴다. 그러다 보면 쓰고 싶은 문장이 나온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야 한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 혼자서 조용한 환경. 그래서 새벽을 고집한다. 한낮이라도 집이 비어있으면 쓴다. 일면식이 없는 시인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지인의 지인이라고 했다. 시집 한 권에 실리는 시인의 마음과 고뇌를 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다. 몇 년 만에 집이 비었다. 어머니는 노치원에 가셨고 남편은 기타를 배우러 갔다. 이렇게 텅 빈 시간이 좋다.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열고 쓰던 글을 마저 쓰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날이다.